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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이원하

나는 밝은 곳에 갇혀 살면서도
바라는 것이 많아요
빛이 나를 뒤흔들었으면 좋겠어요

주머니에 갇혀 살면
과일이 되고 싶을 거고요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날 아침에는
또다른 소원을 빌 것 같아요

아픔도 거뜬히 원해요

아픔이 그리운 날엔
베개 모서리로 내가 나를 긁죠

그런데요, 최근에
난생처음 뒷모습이란 걸 봤는데요
말문이 막힐 뻔했어요

그림자라면 발목이라도 잡고
끌고 다닐 텐데 뒷모습은
잡으려 할수록 쪼개지고 있었거든요

나는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가 겨울엔 쉬어가는 것처럼
겨울이 오기 전에
내게도 어떠한 조치가 필요해요

같이 걸을 사람은 없지만
풀밭에 나가볼까요
풀밭은 꽃을 들고 서 있지 않아도
내게 밑줄을 그어주는 곳이니까요

△이원하: 1989년 서울생. 연희미용고 졸업. 송담대학 컬러리스트과 졸업.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박정옥 시인
박정옥 시인

사람마다 개성적인 스타일이 있듯이 시에도 스타일이 있다. 여러 성향들의 시가 있겠지만 나붓하게 아주 곁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혼잣말하듯 하는 시라서 또 좋다. 분석하고 은유를 들춰내고 숨은 그림을 찾아내야하는 수고로움을 덜어냈기 때문일까 쌈박한 새 친구를 사귀는 기분이 든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가 보다. 등단 3년차의 시인이 일주일 만에 3쇄, 4,500부를 찍었다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력도 특이하다. 문소리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 연기 워크숍에 등록하고 '아가씨'에 단역 배우로 나오기도 했단다. 미용고를 나와 보조 일을 하며 하루 열네 시간 가까운 중노동을 참을 수 없어 그만두고 돈 안 들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그것도 짝사랑하던, 여자친구 있는 남자가 시집을 선물했고 짝사랑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알쏭달쏭하게 글을 썼더니 그게 시처럼 보였단다.

시를 쓰기 위해 제주도로 갔고 6개월 만에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성산일출봉 앞 커피숍에서 알바를 하며 매일 시를 썼고 책상도 없는 작은 방에 온갖 벌레가 들끓고 빨래 돌리다가도 울고, 누워 있다가도 울고 그런데 시는 오히려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나오더라고. 시집 제목에 술은 약하다고 한 건 반하게 하려고, 유혹하려고 썼다한다. 소주 3병정도 마시면 약간 기분 좋게 취한 상태라고 하니.

왜 이렇게 시인의 개인사에 장황한가.
혼자라는 게 두려워 워킹홀리데이 기회를 날리고 고수익 알바도 그만둬버리고 무인도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도 날려버렸단다. 그런데 혼자라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제주에 정착하자마자 시인이 되었다고 했다. 특이한 이력, 경험을 가졌다고 쳐도 힘들고 슬프고 외로울 때 뭔가를 해 낸다는 것. 이것은 평범한 삶의 순간이 얼마나 비범해 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참 아름다운 말이다. 나에게 밑줄이 그어진다는 것은 환희다. 특별함이다.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많은 풀밭을 걸어보았지만 내가 풀을 짓밟고 섰을지언정, 멈추지 말고 나의 밑줄을 찾아보아야겠다. 박정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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