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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편집이사 겸 국장

매일같이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며칠전에는 공직에서 30년을 생활한 한 녀석이 술이 잔뜩 취해 아들놈이 있는 영국으로 이민을 가겠다며 주정을 늘어놓았다. 이유가 딱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곳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정체성을 모르겠단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승승장구하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좌천된 친구는 퇴직을 고민하던 녀석이다. 아들 놈에게 투자를 잘해서 갈 데가 있어 좋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뒷맛이 씁쓸하다. 정말 새로운 세상이 된 것인가. 젊은 시절부터 노동운동에 목을 매다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또다른 친구 녀석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불과 일주일 전 이야기다. 결국은 기득권의 문제라는 게 그 친구 주장의 핵심이다. 진보가 집권하는 순간 진보의 뒷방에서 숨어지낸 부도덕성이 햇살에 드러나면서 악취가 진동했다. 유난히 도덕성을 강조했던 집단이 진보이다 보니 악취의 정도는 더 심하게 느껴졌고 숨어 있던 오만가지 오물들까지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창궐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조국이 전조였다면 윤미향이 구체화된 사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진보의 핵심은 평등인데 결과주의와 포장에 능한 자들이 마키아벨리의 신봉자가 돼버려 과정의 공정성을 뭉갰다는 말도 덧붙엿다. 

보수 기득권의 그늘에서 살아온 친구나 개혁을 외치며 살아온 친구 모두가 좌절하는 시대다. 그러니 요즘은 더욱 혼란스럽다. 여기에 최근 며칠 동안 벌어지는 북한발 대남 협박 성명전은 가관이다. 김여정은 매일같이 핏대를 세운채 남쪽을 향해 육두문자를 남발한다. 어제는 우리 정부를 향해 "언제 봐야 늘 뒤늦게 설레발을 치는 그것들의 상습적인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형식에 불과한 상투적인 언동을 결코 믿어서는 안 되며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의 죄행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삿대질을 했다. 그러면서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깨깨(몽땅) 받아내야 한다"며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 다음번 대적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 우리 군대 역시 인민들의 분노를 다소나마 식혀줄 그 무엇인가를 결심하고 단행할 것"이라고 선전포고용 협박문을 읽어내려 갔다. 입만 살아 있는 김정은 남매의 애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개성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이나 금강산의 상징적 건축물 등이 조만간 폭파되는 모습은 각오해야 할 듯하다. 

어쩌다 이지경이 됐나. 김여정발 삐라금지 경고문이 남쪽으로 전해진 날부터 우리사회는 또 다른 주먹다짐으로 날을 새고 있다. 김여정의 대북 삐라 금지 발언 직후 하수인인 북한 장금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은 "이제부터 흘러가는 시간들은 남조선 당국에 있어서 참으로 후회스럽고 괴로울 것"이라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김여정의 항의에 즉각 답변을 해줬지만 성에 차지 않은 듯 목청을 돋구었다. 전날 청와대는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며 "정부는 앞으로 대북 전단 및 물품 등의 살포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고 법에 따라 엄정히 대응할 것"이라고 화답했는데도 안하무인이다.

북쪽의 반응이 더 세지자 이번에는 통일부가 나섰다. 통일부는 대북 전단을 날려 보낸 탈북민 단체들을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가 하루만에 '수사 의뢰'로 수위를 조절했다. 수위조절에 대해 "내부 혼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국회에 보고했다. 제대로 된 법률 검토 없이 성급하게 '탈북민 때리기'에 나서 스탭이 꼬인 모양새였다. 통일부는 대북 전단 살포가 공유수면법 위반(바다에 오염 물질을 버리는 행위)이거나 항공안전법 위반(초경량 비행 장치 사전 신고 미이행)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견해까지 밝혔다. 애처롭기까지한 대목이다. 흔히 삐라로 부르는 대북전단은 탈북민단체들이 해외후원자들의 성금으로 북한주민들에게 보내는 체제 선전용 홍보물이다. 지난 2004년 우리 정부는 공식적인 대북전단을 중단했다. 체제의 우월성은 이미 판가름 난데다 굳이 정부차원의 전단살포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노무현 정부의 통일정책과 대북 유화정책의 과정에서 시비거리를 만들지 않겠다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지금까지 정부차원의 삐라는 사라졌지만 민간단체의 삐라는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접경지대는 물론 함경도까지 날아가는 삐라는 북한의 체제 흔들기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신성한 백두혈통으로 포장한 김정은 남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의 경제제재나 군사적 압박 보다 전단지에 담긴 김일성 일족의 실상과 백두혈통의 조작된 유전인자가 인민들에게 까발려지는 것이라는 증언이 무수하다. 

상황이 이쯤되자 남쪽의 진보단체들이 야단이다. 한국노총과 민노총은 지난 주말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자는 민족자주와 남북합의 이행의 정신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양대 노총은 "맹목적인 한미동맹을 중단하지 않고서는 남북 합의 이행의 길은 요원하다"며 노골적으로 한미동맹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양대노총이 목소리를 높이자 이른바 진보 시민단체들도 가만있질 않았다. 서울은 물론 울산에서도 진보단체를 자처하는 이들이 "미군은 나가라" "한미동맹 철회"라는 북한의 구호를 뻘건 문구로 도시 곳곳에 붙여놓았다. 관종(관심종자)이재명이 이번에도 팔을 걷었다. 이 지사는 연일 탈북단체를 공격하다 이번에는 "푼돈을 벌겠다고 대한민국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대북전단에도 음모론을 띄웠다. 상대를 저렴하고 누추하게 만드는 진보식 공격법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에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는 뒷전이 됐다. 2020년 우리 사회에는 북한이라는 괴물이 이슈의 중심이 됐다. 북쪽의 자칭 백두남매는 자신들의 실체를 까발리는 삐라를 구실로 남북 간 모든 연결선을 잘랐다. 우리 정부가 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이런 불상사를 예견하듯 발빠른 조치를 취했다. 정부는 지난 11일 삐라를 살포하는 민간단체 관계자들을 교류협력법, 항공안전법, 공유수면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또 단체의 설립 허가를 취소하기 위한 절차에도 들어갔다. 가능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북한 달래기에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육두문자와 욕지거리였다. 어이없게도 이번엔 평양의 냉면집 주방장까지 우리 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쏟아냈다. 북한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오수봉 옥류관 주방장의 발언이라며 "평양에 와서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다"는 발언을 전했다. 

개가 목젖을 세워 고함소리를 높일 때는 불안감이 최대치에 올랐다는 반증이다. 북한의 김정은 남매가 보이고 있는 행태는 북한 내부의 불안감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정상국가인 남쪽에는 불안요인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자칭 백두남매라는 이들과 온갖 퍼포먼스를 벌여 온 것이 우리 정부의 과거사다. 북한 민중을 위한 어떤 정치적 자산 없이 그저 할아비 혈통 하나로 버티는 저속한 남매의 본질을 잊고 있는 모양이다. 백두혈통을 위해서는 인민은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는 남매의 본질을 잊은 채 웃고 떠들었던 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기억마저 대가로 지불하라는 이들의 육두문자는 참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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