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선에 머물다] 너렁국 끓이는 저녁
[詩선에 머물다] 너렁국 끓이는 저녁
  • 울산신문
  • 2020.06.2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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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렁국 끓이는 저녁

                                     한영채

감나무 그늘이 기울던 저녁이었다 백철 솥 아궁이엔 장작이 활활 타며 너렁국이 끓어 넘쳤다 사랑방엔 사춘기를 건너는 오빠의 반항기가 아버지와 싸우는 소리 들렸다 감나무 가지는 담장 밖으로 기울고 대문 앞 우물은 파문으로 일었다 그늘엔 아궁이 불이 활활 타오르고 불을 때던 동생의 달군 쇳소리가 담장 너머 불꽃처럼 튀었다 동생의 가슴팍을 치자 해가 서쪽으로 붉게 기울었다 달려온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바닥을 내려쳤다 땅거미가 빛과 어둠의 경계를 지울 때 부지깽이 연기는 어머니의 부화로 피어올랐다 그와 노을은 뒤란으로 숨었고 끓어오르는 어머니의 속앓이는 흰 광목 치맛자락으로 숨었다 백철 솥엔 철철 넘친 너렁국만이 어머니를 달랬다

* 너렁국: 칼국수의 경주사투리

△한영채: 2006년 '문학예술' 시부문 신인상. 2015년 '울산문학' 올해의 작품상. 2016년 세종나눔 문학도서 선정. 시집 '모량시편' '신화마을' '골목안 문장들'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참 건강하다. 이 에너지 넘치는 풍경, 얼마만인가. 시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과 사물 모두가  제 할 일을 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다. 철철 넘치는 너렁국 주변으로 시간이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시의 한 곳을 누르기만 하면 모두 플레이 버튼을 누른 듯 생생한 영상이 바로 살아난다. 요즘 우리는 목소리와 표정을 마스크 속에 가둔 채 숨죽이고 한 발 한 발 지루한 터널 속을 지나고 있다. 싱싱한 저녁 한 때를 그려내는 이 시가 그래서 반갑다. 이처럼 유년의 한 순간은 툭 잘라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사춘기를 지나는 오빠의 목소리가 불꽃처럼 쨍하니 튀어 오르고 그걸 나무라는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진다. 놀란 노을이 뒤란으로 몸을 숨기는 저녁이 아슬아슬하다. 달려온 엄마의 부지깽이가 바닥을 꽝 하고 힘껏 내려친다.

긴장감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독자는 팽팽한 이 저녁이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 감나무 가지가 담장 밖으로 몸을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속앓이를 숨길 수 있는 어머니의 광목치마가 있기 때문이다. 저녁의 한바탕 소란을 예측한 듯 감나무 그늘은 이미 아늑하고 치마폭은 미리 넉넉하다. 소란은 잠시 대문 앞 우물 속 파문으로 지나갈 것이다.

시 속 모든 행동을 줌인하는 곳이 바로 백철 솥이다. 그 속에는 건강한 가족의 공통분모처럼 너렁국이 끓고 있다. 너렁국은 칼국수를 말하는 경주(혹은 경북) 지방의 사투리라고 한다. 밀가루 반죽을 둘둘 말아서 어머니 칼끝이 빠르게 지나가면 순식간에 도마 가득 국수가 모였다. 그 리드미컬한 광경은 정말이지 신나는 요술 같았다. 그래서 칼국수를 생각하면 쫀득한 맛과 함께 도마 위에서 빠르게 소리 춤추던 어머니의 연주도 생생히 들려온다.
칼국수를 소재로 쓴 시들이 많지만 이렇게 뜨끈하고 건강한 맛은 참 별미다. 곧 그 마당으로 어둠이 깊어지며 여름밤이 올 것이다. 뜨끈한 너렁국 한 그릇씩 먹고 누우면 쏟아질 듯 하늘엔 별이 가득할 것이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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