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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단잠을 가뿐하게 깨우는 건 팔의 솜털 위를 오소소 밟고 가는 바람의 결이다. 창을 타고 넘어 온 명주 결 같은 이 바람은 덥고 짜증나는 여름을 그립고 달달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이 바람 속에는 늦잠에 든 나를 깨우는 어머니 목소리, 뒤 대밭 댓잎 스치는 소리, 구구거리는 암탉 소리, 마당귀에 풋감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어있다. 그리고 눈을 찌르는 아침 햇살과 대빗자루 자국과 흙 마당에 내려앉은 짙은 그늘. 그것이 주는 평온과 그리움과 엷은 슬픔이 오이 즙처럼 잘박하게 배어 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한 어린 늦잠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학원 하나 없는 시골이었으니, 소 한 마리 묏등에 끌어다놓고 소나무 그늘에 깍지 끼고 누워 바라본 하늘은 얼마나 투명했던가. 마을 앞 싱싱한 벼를 흔들고 푸른 배 밭을 지나고 사과밭 지나 높다란 노송에 와 앉은 바람의 노래는 또 얼마나 향긋하고 시원했던가.
오래 전 그리던 울산으로 돌아와 피부로 귀향을 느낀 것들 중에는 이 해풍도 들어있다. 겨울엔 기온은 낮지 않아도 소매 끝을 파고드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리게 한 것도, 봄이 봄을 건너뛴 듯 쌀쌀한 것도 해풍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름엔 도시에 앉아서 내륙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싱싱한 바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이 해풍 덕이라 생각한다. 몇 십리 밖 바다 밑에서 막 건져 올린 해초처럼 싱싱한 이 해풍은 무룡산을 넘으면서, 삼산들을 건너오면서 끈적한 간기를 걸러내고 상큼하고 시원한 바람으로 바뀌어 불어온다.

아침부터 숨을 턱턱 막는 한여름, 회화나무 꽃숭어리가 무겁게 늘어진 아침뜸에 장막을 걷어낸 듯 시원하게 부는 이 착한 바람을 나는 보배 바람이라 일컫는다. 대개는 아침 9시나 10시쯤 불기 시작해서 해가 바짝 달아오를 때까지 두어 시간 착실하게 부는 바람이다. 처음엔 신호인 듯 단풍나무 꼭대기를 슬쩍 한 번 건드려주고 이후 두어 시간 넉넉하게 불어준다.
바다가 보내주는 선물 같은 이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나는 지금도 아이처럼 즐거워한다. 더위에 대한 시름을 잠시 접고 남은 일 처리하는 시간을 얻으니 더 반길 수밖에 없다. 물론 날마다 극명하게 바람이 바뀌어 부는 것은 아니다. 무심히 지나칠 만큼 미미한 날도, 창밖을 내다보다 나무 끝에 일렁거리는 바람의 시늉만 보게 되는 때도 있기는 하다.

선풍기와 에어컨 바람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은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이 바람이 지닌 냄새와 이야기와 덕을 감히 인위적인 바람에 견준다면 나는 많이 서운해질 것 같다.
그런데, 여름 하루를 싱싱하게 열어 주는 이 바람이 요즘 들어 극적 교대 횟수를 부쩍 줄이고 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더구나 미래엔 해상에 더 많은 풍력발전소가 들어설 수도 있다니 알바트로스같은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은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미래의 울산 아이들은 고향을 그릴 때 거대한 풍력발전기 바람개비가 윙윙 돌아가는 바다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수십 년 전 교사 시절, 여름방학이면 중3 학생들을 위한 보충수업이 실시되었다. 스무 평 교실에 다 큰 여학생 육십 댓 명이 꽉 차게 들어 앉아 수업을 받았다. 선풍기나 에어컨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고작 스커트를 살짝 걷어 올려 일렁거려 보거나, 책받침으로 부채질하는 정도였다. 땀에 젖은 여학생들의 볼이 점점 복숭아처럼 달아오르면 '조금만, 조금만' 하며 아침뜸 부조하듯 불어주는 바람을 기다렸었다. 기다림 끝에 바람이 바뀌어 들면 지그시 눈 감고 바람을 맞던 소녀들 얼굴에 금방 생기가 돌고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로부터 수업에 몰입할 수 있었으니 해풍의 힘과 덕은 그렇게 대단했다.
유독 땀 많은 국어선생에게 손수건에 싼 얼음을 살며시 쥐어주고 달아나던 그때의 소녀들이 시원한 바람 속으로 걸어오는 듯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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