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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다섯번의 기적, 논농사의 출발지
지금부터 딱 10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획기적인 기획전시가 열렸다.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라는 이름의 전시행사였다. 이 기획전시는 한반도의 뿌리와 우리 조상들의 이동경로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리였다. 그동안 한반도의 고대사는 왜곡과 훼손으로 방치된 역사였다. 그런데 개발이 1순위였던 현대에 들어 울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의미 있는 출토유적이 쏟아졌다. 말 그대로 기적같은 일이었다. 임진강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사연댐 공사 이후 수몰된 지역에서 발견된 암각화, 검단리 환호 등은 발견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같은 발굴의 현장을 추스려 기확전시를 연 것은 고고학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런데 그 기획전에서 놀라운 유적지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울산 옥현 유적이었다. 옥현 유적은 한반도 최초의 청동기시대의 논 터가 대량으로 발굴된 곳이다. BC 7세기경에 시작된 한반도 논농사의 첫 흔적이 바로 울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관람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공업도시 울산에 한반도 최초의 논농사 유적이라니, 이런 식의 반응이었다. 옥현 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적은 무려 72 동의 움집터와 논, 그리고 수전유적, 환구(環溝. 마을주위를 둘러판 도랑) 등이었다. 놀랍게도 이들 유적은 거의 원형 그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청동기 시대의 농경생활과 문화 및 수전농사의 모습을 확인하는 결정적 지표가 됐다. 

옥현 유적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발견된 논이 청동기시대 전기인 기원전 7세기의 것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수전유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유적은 한반도에서 적어도 기원전 7세기 이전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논농사가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증좌가 됐다.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수전유적이 확인되지 않았고 일본의 경우에는 큐슈의 나바다케·이타즈케 유적, 오사카의 이케시마 유적 등이 있어 마치 일본이 논농사에서 선진문화를 가진 것처럼 알려졌지만 울산 옥현유적으로 모든 것이 정리됐다. 일본의 논농사 유적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들도 기원전 5세기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옥현 유적의 발견으로 수전경작이 한반도에서 유래되었고 일본의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서 기원했음이 입증됐다. 

논농사의 첫 시작이 증명된 울산은 과연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육지부에서 태양이 가장 먼저 뜨는 곳이 울산 땅 간절곶이다. 태양이 가장 먼저 뜬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 인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태양의 기운이 모든 에너지의 출발로 여긴 북방계 인류의 한 무리는 그들이 신성시 한 태양의 시작점을 쫓아 대륙의 끝으로 이동했다. 그 끝자락이 울산이다. 어쩌면 그 무렵 남방고래류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북으로 향한 폴로네시안계 해양문화권 인류가 귀신고래를 만나 정착한 땅이 울산인지도 모른다.

그 일단의 인류의 무리들이 각각의 문화로 삶을 시작한 땅이 울산이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북방계와 남방계 인류가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땅이 울산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해양문화의 한 축이 바로 귀신고래다. 종의 이름에 한국을 달고 있는 희귀종인 귀신고래가 생애의 시작과 번식을 갈무리 하는 곳이 바로 울산이다.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 또는 Western Gray Whale)다. 한국 귀신고래는 1964년 5마리를 포획한 기록을 끝으로 과도한 남획의 결과 동해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멸종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1993년 사할린 연안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엄청난 땅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바로 울산이다.

그런 증좌가 울산이라는 땅의 역사에 풍요로움을 더해주지만 정작 울산사람과 대한민국 사람들은 울산을 역사의 줄기에서 민망할 정도로 천시한다. 지난 2012년 문화재청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증좌인 옥현유적관을 폐쇄했다. 찾는 이가 없어 운영이 어렵고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사실은 돈이 안된다는 이야기다. 옥현유적관은 박물관이 아니다. 유적관은 유적의 의미를 부여하는 유적이 나온 지역의 장소성에 주목하는 기념비적인 구조물이다. 우리는 물론 세계 모든 나라들이 중요 유적지에 표석을 세워 발굴장소의 의미를 알리는 것과 같은 상징이다. 실제로 옥현유적관 안에는 청동기 유물이 거의 없었다. 옥현유적관 발굴을 주도한 경남대 박물관에 옥현유적 출토품이 전시 돼 있다. 이 유물은 당연히 울산이 돌려받아야 한다. 누가 나서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경남대와 유물 반환 협의를 한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이곳을 제대로 정비하고 울산에 한반도 최초의 논농사 유적이 있음을 알리는 작업을 했는지 울산의 문화계와 리더들은 반성해야 한다. 모형물과 패널 전시밖에 없는 곳이기에 함부로 폐관해도 된다는 천박한 문화 과시주의 화려함만 추구하는 문화 사대주의가 낳은 치부다. 

이쯤에서 가정법을 펼쳐보자. 바다 건너 왜놈들이었다면 옥현 유적관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을까. 아마도 큐슈 나바다케 쯤에서 청동기 논농사 유적이 쏟아졌다면 시작부터 요란하고 시끌벅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사학계는 즉각 정부와 연계해 발굴지역을 봉쇄한다. 우선 유물 출토지역은 원형보존하고 철저히 비밀리에 추가 발굴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곤 인근에 유사한 모양의 관람시설과 기념관을 지어 인류 최고의 논농사 유적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해마다 발굴기념일에 맞춰 세계 유수의 관련 학자들을 큐슈로 모이게 해 일본의 오랜 문화유적과 인류 이동의 발자취를 조명하고 일본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우리의 꼴은 어떤가. 유적지와 별개의 장소에 초라한 기념관 하나 지어놓고 그것도 모형만 전시한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며 푸념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관리비와 운영비가 많이 든다며 이 정도라면 폐관이 어떻겠냐고 여론전에 나선다. 결국 무관심과 예산부족을 내세워 문을 닫고 입구를 막았다. 불과 얼마전에 울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 문화재 행정의 민낯이다. 그런 문화인식을 가진 자들이 문화재 행정을 주무르고 반구대암각화 보존에 입을 대고 있으니 딱하고 한심한 노릇이다. 

말이 난 김에 옥현유적지를 좀 더 들여다보자. 앞서 이야기 했지만 울산의 검단리 유적은 세계 고고학계의 입을 벌리게 했다. 물론 그 때까지 자신들이 고대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했다고 주장했던 일본의 학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 증좌가 울산 검단리에 수천년 동안 파묻혀 있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일본 사학계는 일본의 고대문화, 즉 구석기나 신석기 청동기 문화는 중국에서 직접 들어온 것이라며 한반도 유래설을 부정했다.

그런 상황에서 울산 검단리 유적이 발굴되자 일본의 연구자들도 굴복했다. 검단리 환호 취락구조는 바다를 건너 일본의 취락구조의 뿌리가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논농사 터가 울산 옥현지구에서 드러났다. 울산 옥현 유적은 대한주택공사가 토지조성사업지구를 계획하던 중에 확인됐다. 1997년의 일이다. 경남대 발굴팀이 주도한 조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을 포함 청동기시대 집자리, 도랑 유구, 구덩이, 논, 수로 등이 하나씩 펼쳐졌다. 이 유적의 핵심은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논이었다. 청동기시대 논은 농사를 지은 발자국, 경작 도구 흔적, 기둥 자리 등이 확인됐고, 논둑을 끊어 물이 빠지게 만든 물꼬가 확인됐다. 몸돌이나 밀개, 찌르개 등의 뗀석기도 다량으로 쏟아졌다. 농경문화의 핵심인 정착문화의 기본부터 응용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셈이다. 바로 그 자리가 울산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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