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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길을 걷는다. 톳 내 묻은 바람이 오르막 골목으로 등을 민다. 초록 대문간을 기웃대보고, 낡은 철망으로 대문을 대신한 기와집 마당도 들여다본다. 마루 밑 예쁜 슬리퍼는 기약 없이 올 주인이나 나그네의 공간임을 대신해 주는 말이리라.
톳을 따라 영문 모르고 왔을 평상 위 배질배질한 파래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든다. 전성기의 녹색 파래 이야기도 들리는 듯하다. 낯모르는 할머니의 굽은 허리를 지탱했을 스티로폼 테왁은 못다 들은 할머니 얘기를 더 듣기 위해 뭍으로 올라왔을까, 제 자리인 바다를 넘보듯 담장에 매달려 되돌아갈 날을 세고 있다.

돌아 나와 돌담 밑 송엽국 줄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어깨보다 낮은 돌담이 정답다. 돌담 너머 마당엔 노란 고무 장판을 깐 평상만 덩그렇게 놓여 외롭단다. 골목 끝 담 밑에는 개망초와 모싯대가 서 있고 도꼬마리 풀과 완두콩을 털고 난 검불이 쌓여 있다. 온 마을은 톳멍석을 깐듯 새까맣다, 길도 밭도 산허리도 다.
마을은 사람이 산 흔적만 있을 뿐, 빈집이 많다. 빨강 파랑 원색 지붕 아래 그려놓은 벽화는 파도 잔잔한 바다에 잠시 이는 파랑을 보듯 사뜻하다. 골목을 걷다 옷깃을 여민다, 뒤에서 불어와 서편 바다로 미는 바람에 닿은 목덜미가 시리다. 못 둑 아래 작업용 평상 위에 걸터앉아 듣는 새소리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평상 옆에 퇴색된 주황색 테왁과 엮임이 성근 그물이 대화를 이끌어 간다. 고됐노라고, 외로웠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인간을 대신해 짠물을 먹고 먹어 삭은, 질기디질겼을 밧줄이 물질 멈춘 노쇠한 해녀인 양 끌려 나와 석죽은 모습이다. 얼마나 험한 풍랑과 싸워 저 굵은 밧줄이 닳았을까.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곧추세운다. 바람이 눕자 뱃고동 소리조차도 잠들었는지 가뭇없다.
올라갔던 길에서 등 돌려 방향을 바꾼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에 실려 온 바닷냄새가 코를 시원하게 뚫어 준다. 방품림 속 낡은 학교는 세월의 무상함에 익숙해진 듯 처연하다. 무성한 개망초 무리는 제 터전인 양 편하게 자리 잡고서 뱃고동 소리 닮은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정지된 듯 한적하다.

물질 멈춘 노쇠한 해녀인 양
석죽은 주황색 테왁
한 점 남은 노을 잔영에
내 자리도 점점 사위어진다


고요가 쌓은 평화가 온몸의 신경을 무장해제 시킨다. 적막함이 전하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은 애잔하던 나의 동화로 되살아난다. 이곳 섬사람들의 일상을 동화 속 배경으로 그려 넣고 눈을 감는다. 마루에 걸터앉아 잘 쓸어 둔 흙 마당을 바라보며 발밑에서 쳐다보는 누렁이랑 햇살 말갛게 깔린, '집 보던 날'의 기억을 불러내 그 안에서 노닌다. 서쪽으로 넘어가던 성근 햇살을 등지고 앉아 사금파리로 흙 마당에 낙서를 하면 누렁이가 지우개처럼 입으로 흩트렸다. 손끝으로 전해지던 누렁이 털같이 보드랍고도 쓸쓸한 시간이었다. 잠시 펼쳤던 동화를 접고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나 허리를 곧추세운다. 기지개를 켠다, 풀숲에 앉았던 새들이 해변으로 가자며 푸드덕 난다.

먼 곳에 눈길을 두고 걷는 발목을 붙드는 고함에 발길을 멈춘다. 낭만과 서정만으로는 바다를 지킬 수 없다고, 현실 속 악다구니가 있어 이를 악물고 지킨 바다라고 외치는 듯하다. 길가에 늘어 둔 톳을, 찌든 때 묻힌 도회색 바퀴가 감히 누르고 가다니!. 아낙은 당신의 가슴이 짓눌린 듯 서슬 퍼렇게 일어섰다. 그곳은 길 아닌, 삶의 일부분이란 것을 나그네는 몰랐던 모양이다.
해가 기울고 있다. 하루해를 넘기기가, 마지막 힘을 빼기가 하루해를 넘기기가 저다지도 힘들까. 붉게 붉게 타다 남은 기운을 토하고도 해는 바위 꼭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점점 짙게 불태운다,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던 불더미 닮은 해는 초침을 따라 넘어갔는데 주위를 둘러쌌던 햇무리는 거둬들임이 늦다. 햇무리 반영은 백사장 끝 파도를 타고 출렁대느라 돌아갈 줄 모른다.

한 점 남은 노을은 붉은 물비늘을 타도록 두고 거둬가지 않는다. 주위 바람이 편안히 넘어가시라고 간곡히 염원하는지 잔잔하다. 타던 흔적을 쉬이 거둬가지 않는다. 저 한 몸 무난한 듯 하루를 사나 싶었지만, 마지막 갈 때 저토록 많은 말을 가슴에 품기도 하고 내지르기도 하면서 가나 보다. 나오는 줄 모르고 태어나, 돌아갈 때 이승에 미련 갖는 인간사와 다를 게 없다.
실바람이 불자 그간의 기억하라는 듯 붉은 노을의 잔영을 실어 나르기 바쁘다. 톳이 밀려 나온다. 두 팔을 들어 엉덩이를 흔들며 호들갑스럽게 달아나던 달랑게가 구멍 송송 난, 제 집으로 쏙 들어간다. 키 큰 곰솔 나무를 등지고 앉은 이곳, 내 자리도 점점 색이 사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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