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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귀로 듣고 흘리다
                                                                                         이경례

혼잣말 하는 예사소리도 귀담아주는 바위가 있다면 믿겠느냐 은해사를 비껴 암자 오르는 길, 물소리에 쏠리다 만 바위의 한 쪽 귀는 보살들의 간절한 서원에 비길 만하다 닳아 없어진 지 오래인 듯한 귓바퀴, 외이도 너머까지 소리를 따라가 보아도 고막도 달팽이관도 보이지 않지만, 입술 달싹이지도 않은 나의 군소리를 다 받아들이고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본래 모습의 바위, 장좌불와 하는 기도도량이 저 위 어디쯤 있음에랴 진흙탕을 달고 온 발길이 한결 가뿐하게 내리막으로 쏠린다 그제야 흙 속에 묻힌 다른 쪽 귀가 염려스럽기만 한데 정작, 귀를 내어준 바위야 저 홀로 묵직하고 말지

△이경례: 울산 출생. 2006년 '심상' 신인상. 2009년 '영남일보' 문학상으로 등단,  봄시 동인, 시집 '오래된 글자'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몇 해 전 이경례 시인의 시집에서 보았던 시 '한 귀로 듣고 흘리다'에서 '은해사'를 만났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와락 밀려 왔던 기억이 있다. 그리운 것은 늘 과거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도시에서 도망치듯 달려갔던 젊은 날의 은해사. 여름날 새벽 예불 후 극락교 앞 벤치에서 시인이 믿는 '혼잣말을 하는 예사소리도 귀담아 주는 바위'에게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위안을 얻었던 그 여름날이 생에 녹음의 순간이었던 것처럼 새삼 그리워졌다. 또한 산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하여 새벽에 무한정 안개를 기다린 적도 있었던 銀海寺. 잊고 또 도시에서 한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시간 너머로 소급된 푸르름을 시인이 보낸 준 것 같아 잠시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 금포정 숲길을 추억하기도 했다. 숲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의 청하한 물소리 또한 기억의 한 순간을 놓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달고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나를 보게 되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을 안고 살 때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누군가가 절실해지곤 한다. 어쩜 시인은 은해사 금포정을 들어서면서 그 간절함에 걸음은 더 더디어 졌고 생각은 깊은 우물 속처럼 무거웠으리라. 서운암, 백흥암, 운부암, 중앙암을 차례로 오르면서 계곡의 모양대로 흐르는 물에게 전부를 다 내어 준 바위의 닳은 귀를 통해 천천히 가벼워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 않았을까? 시인은 밖으로 발설하지 못한, 심연에서만 아우성이었던 것들을 흔들림 없는 바위를 통해 비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쩜 바위보다 더 무거운 것을 내려놓기 위해 오르기보다 '외이도 너머까지 소리를 따라가'는 실행이 편안했는지 모른다. 차례차례 실타래가 풀어지듯 그때서야 햇빛에 반짝이며 바람에 마음을 열고 있는 잎들이 보였을 것이고 물길을 가로막은 것이 아닌 물의 속도를 조절해주는 바위의 느긋한 모습에 웃었을 것이다. '진흙탕을 달고 온 발길이 한결 가뿐하게 내리막으로 쏠린다'라고 시인이 속내를 보이고 있음은 그렇게 마음이 다스려진다는 것을 그땐 몰랐지만 한동안 편안했지 않았을까? '아픔을 꼭 안아주되 내 아픔을 안아달라고는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일이다'라는 혜인스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입술 달싹이지도 않은 나의 군소리'가 음성화 되었다면 내려오는 길이 가뿐하지 않았음을 시인도 알았을 것이다.

시인은 물살에 닳아진 '바위의 한 쪽 귀를 보살들의 간절한 서원에 비길 만하다'. '귀를 내어준 바위야 저 홀로 묵직하고 말지'라고 죽비소리 같은 말로 삶을 돌아보게 한다. 한 줄기 솔바람이 휘잉 지나듯 어두운 방 창이 번쩍한다. 시인의 시집에는 젊은 날의 순간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편들이 여름 싱그러운 그늘로 다가와 몇 번을 읽게 했다. 고요한 산사의 계곡 따라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바위에게 풀어놓을 이야기는 이제 좀 여유로워 질 것 같은.
 도순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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