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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 에토샤국립공원을 붉게 물들인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는 얼룩말. ⓒ서영교
나미비아 에토샤국립공원을 붉게 물들인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는 얼룩말. ⓒ서영교

야생 동물들의 천국 에토샤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리다 헤레로 족 여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제대로 된 가게라기보단 나뭇가지를 얽어 햇빛을 피하는 정도였고, 수공예품들을 내놓고 있는데 판매보다는 사진 찍혀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게 목적인 듯 했다. "원 포토 텐 달러!" 물론 사진만 찍고 사라지는 관광객들을 상대하며 나온 궁여지책이겠지만, 마음 대신 돈이 오고가는 것은 싫어서 정중히 사양했다.

# 신의 축복인지 악마가 건넨 독인지
여행자들은 여행지에서 돈을 쓸 때 습관적으로 자기 나라 돈으로 환산해 생각한다. 그래서 쓸만하다 생각되면 기꺼이 쓴다. 하지만 이 때 생각해야할 문제는 현지의 물가이다. 관광객을 많이 상대해본 현지인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물가 대신 관광객들이 감당할만한 돈을 생각한다. 이 간격이 클 경우 가치의 혼란을 가져와 그들의 자생적 경제 생태계를 해칠 수 있다.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가벼운 동정심과 개인적 욕심으로 기꺼이 내준 10 달러라는 돈은 하루 1~2달러의 돈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의 축복이 아니라 악마가 건넨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돈을 내지 않고도 조심스레 안면을 트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을까봐 험한 인상을 쓰던 여인과 지금 카메라 앞에서 수줍게 미소 짓는 여인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헤레로족 여인. ⓒ서영교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헤레로족 여인. ⓒ서영교

길 한쪽엔 아이가 혼자 놀고 있다. 한 손에 쥔 과자봉지는 이미 텅 비어 있었지만 손에서 놓지 않았고, 바닥에서 흘리지도 않은 과자 부스러기를 찾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아무도 같이 놀아주지 않는 길가에서 낯선 이방인과 눈이 마주친 아이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로 달려왔다. 아이의 엄마는 한쪽 구석에서 재봉틀을 돌리며 간간이 아이에게 눈길을 보냈다. 길가의 재봉틀 하나. 벽이라곤 없는 작업실이 생소하게 보였다. 

독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우다 학살당한 수만 명의 헤레로 족. 20세기 최초의 홀로코스트였다. 독일은 최근에서야 사과했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같은 유럽에서와는 달랐다. 헤레로족 여인. 그들이 통과해온 유혈의 시대를 생각하는 것은 참담하지만 원색의 알록달록한 원피스와 아름다운 뿔을 연상시키는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은 동화책에서 막 뛰어나온 듯하다. 옷은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척박한 땅에서 저런 화려한 옷을 입고 이루어지는 삶의 형태는 어떤 것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리를 굽히지 않고 옆으로 펼쳐 낮춘 자세로 목을 축이는 기린 무리. ⓒ서영교
다리를 굽히지 않고 옆으로 펼쳐 낮춘 자세로 목을 축이는 기린 무리. ⓒ서영교

# 척박한 땅위에서 꽃피운 원색의 옷
다시 달린다. 무한반복 되는 창밖 풍경에 지쳐갈 때 즈음, 얼룩말과 누 떼들이 마치 꿈인 것처럼 바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야생 동물들이 사는 세상과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경계에는 뭐라도 벽이 쳐져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던 나는 느닷없는 태세전환에 깜짝 놀랐고, 가슴에선 반쯤 열린 콜라처럼 뭔가가 끓어올랐다.

어두워진 야영장을 찾아 플래시를 비춰가며 텐트를 치고, 급한 마음에 저녁도 미룬 채 야영장 옆의 워터홀로 향했다. 멀리서 코끼리의 울음소리, 사자의 포효가 이따금씩 들려온다. 워터홀은 동물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물웅덩이를 말한다. 이곳의 주인은 동물들이다. 

워터홀을 빙 둘러싸고 있는 벤치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리를 내면 안 되었고, 워터홀을 비추는 어두운 조명 외에 다른 불빛은 없어 벤치에 앉아 있으면 마치 어둠속에 홀로 있는 듯한 고요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크고 작은 다양한 동물들이 삼삼오오 워터홀을 찾아 서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며 물을 마시는데, 그 단순한 행동을 관찰하며 앉아 있는 시간이 절대 지루하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저 동물들이 그저 물 마시는 단순한 행동까지 즐겁게 관찰하는데, 평소에는 왜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자세히 바라봐주지 못했을까. 새삼 감상에 젖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새벽에 일어나 게임드라이브에 나섰다. 어둡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대지는 곳곳에 털이 빠진 짐승의 피부처럼 메마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여명의 순간 그곳은 푸른 바다로 변했다. 곧이어 붉게 달아오르는 태양이 대지를 깨우자 색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녀석들의 실루엣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태양이 대지를 깨운다'는 표현이 평소라면 좀 간지러운 미사여구로 느껴졌겠지만, 직접 마주하는 광경은 이 이상 사실적인 표현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을 먹다가도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수컷 사자.
물을 먹다가도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수컷 사자. ⓒ서영교

#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망원렌즈를 통해 마주한 기린의 짙은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맑고 투명해 그 속이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동물의 세계와 식물의 세계를 이어주는 중계자가 있다면 단연코 기린일 것이다. 물을 마실 때 그 길고 가느다란 다리를 굽히지 않고 옆으로 쭉 펼치고 선 모습은 마치 갈라지기 직전의 나무젓가락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저 멀리 스프링복이 줄지어 걸어간다. 매끈한 모습에 가느다란 다리로 걷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멀지 않은 곳에 사자 한 마리가 앉아 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다. 잡히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겠지. 아닌 게 아니라 사자는 갈기의 털도 많이 빠지고 삐쩍 마른 늙은 수사자인 듯하다. 누가 백수의 왕이라고 했던가. 저 모습에 여유는 없다. 사자라고 하루 종일 사냥만 하진 않을텐데, 사자 주변엔 아무도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워터홀 쪽으로 힘겹게 걸어오는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차 옆에 얼룩말들이 무리를 지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들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저 멀리 들판에 홀로 커다란 외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그 아래 그늘에 사자 가족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새끼들은 어미를 귀찮게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 해가 뜨면 그 아래 있는 것들은 타는 듯한 태양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 다른 도리가 없다.

유일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곳이 어쩌다 하나 있는 나무 그늘인데, 그것을 사자 가족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룩말들은 그저 멀찌감치 서서 사자의 휴식이 끝나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삶과 죽음이 경계 없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저렇게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왕의 모습이라고 할까. 

사파리가 끝나갈 무렵에 가까이서 사자를 봤다. 암놈이 천천히 걸어가서 물을 마시고 다시 이동하자 수풀에 있던 수놈이 나타나 천천히 워터홀로 걸어가 물을 마시고는 암놈이 간 곳을 향해 이동한다. 수백 미터나 떨어진 이들 사이에 우리에게는 감지되지 않는 어떤 교감이 있는 것일까?

단순히 물을 마시는 행동에도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사자는 마치 지뢰밭이라도 걷는 듯 한 발 한 발 신중히 내디뎠다. 주변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 했지만 뷰파인더를 통해 눈이 마주칠 때면 마치 탄환이 날아와 꽂히는 듯 서늘함이 느껴진다. 

카리스마 넘치는 코끼리도 만났다. 나는 아무래도 코끼리라는 이름이 불편하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도 풀을 먹고 사는 저 고귀한 존재는 마치 구도의 길을 걷는 성자의 모습인데, 기껏해야 코가 길어 코끼리 아저씨라니 너무 무성의하지 않나.

야영장 옆의 워터홀에서는 코뿔소 두 마리가 조용히 싸움을 하고 있다. 워낙 느릿느릿한지라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싸우고 있다는 걸 알 정도였다. 소리조차 내지 않으니 참 조용한 싸움이었다. 한참을 서로 이리저리 밀고 밀리며 있으니 한 마리가 싸움을 말리려는 듯 끼어들더니 이내 한 놈 편에 서서 다른 놈을 같이 밀어낸다. 버티던 놈은 결국 발걸음을 돌린다. 조용한 승리였고, 조용한 패배였다. 

# 아프리카의 현실에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코뿔소는 강아지를 위해 만들어 놓은 다리를 누군가 실수로 코뿔소에게 붙여버린 듯, 육중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애처로워 보인다. 코뿔소를 보고 있자니 덴마크의 어느 조각가의 작품이 생각났다. 제목은 뚱자생존 The Survival of the fattest. 중년의 비만여성이 되어버린 정의의 여신이 비쩍 마른 아프리카 남자의 어깨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지금 한 남자의 어깨에 앉아 있어요. 그는 점점 가라앉고 있죠. 나는 그를 위해 뭐든 할 거예요. 그의 어깨에서 내려오는 것만 빼구요" 제 3세계를 착취하는 서구 선진국의 맨얼굴과 아프리카의 현실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작품은 이곳 아프리카에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자들의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지금의 서구의 번영은 아프리카와 중남미로부터의 착취 위에 세워졌다. 유럽인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국경선이 마치 레고 블럭처럼 보이는 지도를 볼 때마다 착잡한 마음이 든다.

'지리의 힘'이란 책에서 '유럽식민주의자들은 닭도 없이 달걀을 만들어냈다. 그로 인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논리적 부조리가 반복되고 있다'라고 썼듯이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뒤늦게 그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서영교<br> class614@naver.com <br>1971년생, 현 CK치과병원 원장 <br>울산대 평생교육원 사진창작반 수료 <br>단체 및 그룹전 7회
서영교
class614@naver.com
1971년생, 현 CK치과병원 원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사진창작반 수료
단체 및 그룹전 7회

뿔과 상아가 도려내진 채 죽어가는 코뿔소와 코끼리를 볼 때면 인간의 잔혹함에 치를 떨지만,  우리는 총 대신 플라스틱과 자동차와 고기와 커피를 소비하면서 그들을 죽이고 있다.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캠프로 돌아와 일몰을 맞이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일부러 하늘을 쳐다보지 않아도 하늘이 온통 내 시야에 가득 찬다. 해가 뜨고 지는 그 붉은 기운도 매일 볼 수 있다. 빌딩숲 사이로 겨우 비집고 나온 수줍은 붉은 빛이 아니라 홀로 서있는 거대한 아까시 나무와 기다란 기린의 얼굴이 실루엣으로 나오는 장엄한 노을이었다. 

"나는 하루에 마흔 세 번의 일몰을 본 적이 있어" 

해질녘을 좋아한 어린 왕자는 일몰을 보기 위해 단지 몇 걸음만 걸어가면 되었다. 일몰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일상에서 벗어나 이곳 아프리카에서 나는 어린 왕자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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