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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온산읍 화산공원에 세워진 온산 이주민 망향비. 한삼건 교수는 "남겨진 시간이 너무 짧은 만큼 공장 개발과 공해 이주로 사라진 마을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정리하고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주군 온산읍 화산공원에 세워진 온산 이주민 망향비. 한삼건 교수는 "남겨진 시간이 너무 짧은 만큼 공장 개발과 공해 이주로 사라진 마을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정리하고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산업수도라 칭하는 울산의 공업 발전 이면에는 울산시민들의 아픔이 응어리져 있다. 공장을 짓기 위해,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에 큰 저항 없이 삶의 터전을 내주었던 울산사람이다.
 
그리고는 공단에서 뿜어대는 검은 연기를 도저히 인내하며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공해 피해주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또 한 번 고향 땅을 등져야 했던 이들도 울산사람이다. 때문에 울산의 실향민 역사는 국내 최대 공업도시로 성장한 울산이 기억해야할 또 다른 역사가 되고 있다.
 
# 고향 내준 자리엔 아무도 찾지않을 망향비만
고향을 등진 채 떠나야 했던 사람 중에는 그나마 운 좋게 울산 곳곳에 뿌리 내려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기도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못한 사람들은 부산 양산 서울 등지로 떠나야 했다. 모두들 가슴 한켠에는 망향의 아픔을 깊숙이 묻어 두고 산다.
 
공단 조성으로 인한 이주 실향민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만난 한삼건 교수는 울산과 이주 실향민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국가의 요구로 민족의 빈곤 탈출과 경제 재흥을 위해 선택된 울산에서는 아름다운 산천과 해안선이 파괴됐고, 마을이 사라지면서 주민들은 영구히 고향을 빼앗겨 버렸다. 철거 이주민의 기억마저 사라진다면 우리의 빛나는 성취에 가려진 그들의 아픔과 교훈을 동시대 사람들이 공감할 수도 없고 후대에 전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주민들이 세운 마을 옛터비로 부족하다. 이제 남겨진 시간은 너무 짧은 만큼 공장 개발과 공해 이주로 사라진 마을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정리하고 남겨야 한다." 

면 소재지였던 당월마을(1980년)은 한때 335세대 1,900여명이 거주했던 온산은 대표하는 마을이었다. 권오룡 제공
면 소재지였던 당월마을(1980년)은 한때 335세대 1,900여명이 거주했던 온산은 대표하는 마을이었다. 권오룡 제공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은 소 풀 뜯으며 놀았던 마을 언저리에 그들만의 기억의 공간을 만들고 '마을 옛터비'다 '망향비'라는 이름으로 추억의 상징물을 남겨 놓은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자체는 이런 주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보듬어 주겠다며 거금을 들여 제각각의 기획의도를 담은 망향비, 망향탑을 세웠다.
 
한 교수와의 이날 동행은 이러한 망향비를 찾아서 실향민들이 돼 버린 이주민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기 위한 것이었다.
 
# 지자체 거액 들여 세운 망향탑·망향비
울산에는 이주민들의 실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세운 탑이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남구 성암동 산17 일대 근린공원에 세워진 망향탑이다. 2008년 9월 18일 건립된 이 망향탑은 가로 4m, 세로 3m로 옆에 알의 형상을 한 조형물과 처용암 조각도 설치됐다. 2,000㎡ 규모의 광장에는 느티나무 등 2,160여 그루도 심었다. 모두 16억원이 들었다.
 
이 망향탑은 남구 용연·용잠·매암·황성동 등 10개 동 지역에 살다가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됨에 따라 1986부터 19997년 남구 야음·다운·삼호동 등으로 이주한 6,000여 가구 3만여명을 위해 세웠다. 

복어잡이 전진기지로 한때 전국 최고의 어획고를 자랑했던 우봉마을(1984년)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옛 자취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권오룡 제공
복어잡이 전진기지로 한때 전국 최고의 어획고를 자랑했던 우봉마을(1984년)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옛 자취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권오룡 제공

또 다른 하나는 온산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고향을 잃은 이주민 애환을 담은 망향비다.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화산근린공원에 세워진 이 탑은 2010년 8월 31일 당시 군수와 의장, 온산주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가졌다.
 
망향비는 지난 1974년 4월 온산국가산업단지 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10개 법정리의 19개 행정마을 주민 2,804가구, 1만 3,000여 명의 실향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높이 8.5m, 폭 2.5m, 좌대 높이 1.5m에 19개 마을의 사진과 유래가 새겨져 있다.
 
두 곳의 망향탑과 망향비는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너무나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망향비를 찾아 나선 동행의 길에서 한 교수는 말한다.
 
"돌이켜 보면, 공단 조성과 공해로 마을이 철거되면서 주민과 주택만 옮겨간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 있던 가게와 이발소, 약국 의원, 양조장과 동사무소, 교회, 사찰도 모두 옮겨가거나 문을 닫았다. 마을 입향조를 모시던 제당도 천도제로 이별을 고했고, 주민들의 생활을 지탱해 주던 우물이며 방앗간 공동묘지는 버려졌다. 바닷가 어장과 어선은 물론 어업 창고와 고기 잡던 배도 새 거주지로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온산읍 이진리 공장 주변 도로에 위치한 기암괴석.  김동균 justgo999@ulsanpress.net
온산읍 이진리 공장 주변 도로에 위치한 기암괴석. 김동균 justgo999@ulsanpress.net

일정상 우리 일행은 온산 화산공원의 망향비를 먼저 찾았다. 망향비가 세워진 화산공원에서의 첫 느낌은 놀랍다였다. 온산공단 한 복판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고, 외로운 섬 같은 이곳의 망향비를 누가 과연 찾아 올 것인가 싶어 놀라웠다.
 
매케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현장은 그마나 공들인 흔적이 보였지만 공원 조성 이후 10년이 흐른 탓에 여기저기 안내판 글자와 사진은 퇴색된 채다. 과연 누가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인가. 서글픔에 가슴이 울컥 거린다.

공원을 둘러보던 한 교수는 말했다.
 
"그마나 이런 공간이라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하지만 사람이 사라지면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망향비를 세우고 공원을 조성했지만 전시물은 퇴색되고 현장 방문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도 없다. 옛 마을 전경을 담은 사진들이나 글자도 모두 희미하게 바랜 상태다. 어떤 마을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제대로 남겨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마을 흔적을 입체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새로운 전시공간의 필요성이 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육성이나 영상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도 있어야 하겠다."
 
망향비가 세워진 화산공원은 마치 외딴 섬 같았다. 망향비 제막식 행사 참가자 외에 과연 누가 이런 공간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을지 의문스럽다.
 

기암괴석과 해안 절경이 빼어난 이진마을 (1985년). 권오룡 제공
기암괴석과 해안 절경이 빼어난 이진마을 (1985년). 권오룡 제공

장소를 남구 망향탑으로 옮겼다. 망향탑은 울산석유화학 공단 조성 등으로 사라져 간 남구지역 이주민들을 위해 남구 성암동 산17 일대 근린공원에 세워졌다. 현장을 향해 걸으면서 끝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은 왜 일까.
 
석유화학단지 뒤편에 세워진 망향탑 앞에 서서 우리 일행은 솟구치는 울분을 자제하기 힘겨울 정도가 되고 만다.

망향탑이 세워진 곳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 산 정상에 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 설명해주는 안내판 조차 볼수 없다. 대충 봐도 엄청난 예산이 들어갔음을 말해주는 웅장한 규모의 대리석 덩어리들.

긴 백사장과 큰 어장이있던 울주군 온산읍 당목마을(1978년)은 현재 에쓰오일(S-Oil ) 공장이 들어 서 있다. 권오룡 제공
긴 백사장과 큰 어장이있던 울주군 온산읍 당목마을(1978년)은 현재 에쓰오일(S-Oil ) 공장이 들어 서 있다. 권오룡 제공

"이 곳 망향탑에는 이 망향, 실향민 마을을 공단 개발로 내주고 간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지자체의 일방적인 생색만 있을 뿐이다. 공단 개발, 그리고 공장 조성에 따른 공해 피해로 떠나야 했던 이주민들의 고통이나 아픔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엉뚱한 생산물이 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다."
 

한삼건 교수
한삼건 교수

망향탑 앞에서 한 교수의 탄식이다.# 울산공업 역사는 울산이주 살향민의 역사
울산이 공업센터로 지정된 1962년부터 울산시민의 이주사는 시작됐다. 정유공장이 들어선 남구 고사동을 시작으로 한국비료와 영남화학이 들어선 여천, 돋질, 산암, 자리방 마을과 동양라이론 부지가 된 남도 마을 등이 차례로 철거된다.
 
1970년대에는 남구의 산업도로 인근 하개마을 일대가 석유화학단지로 개발되면서 철거된다. 특히 고사동 주민은 처음에 부곡지구로 천막을 지어 옮겨갔지만 1990년대에는 부곡지구가 다시 공해 때문에 전면 철거됐다.
 
고사동 주민을 비롯해 초창기 철거마을 주민들 중에는 공장 개발과 공해 때문에 여러 번 강제 이주한 사람이 적지 않다.
 
동구에서는 현대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미포, 안미포, 녹수, 바드래, 송정마을 등이 사라졌고, 북구지역의 양정동, 염포동 일대는 염포로를 경계로 해안쪽 마을과 집이 철거돼 사라져버렸다.
 
온산공단 개발은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 조성 때와 마찬가지로 온산읍 일대에 있던 당월리, 원산리, 대정리, 이진리, 신암리, 방도리 등에 속한 수많은 자연마을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없애버렸다. 

울산에 공단이 조성된 이래 가장 풀기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가 바로 공장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공해 문제였다. 공장을 가동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유독 가스나 폐수를 배출할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따라 주민들이 항의 소동은 물론 보상 시비를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권오룡 (사진가, 덕신칼라 대표)
권오룡 (사진가, 덕신칼라 대표)

이에 따라 정부는 울산 온산공단 공해 피해주민을 위해 단계별 이주 계획을 추진한다. 1981년 울산의 공해오염지구 주민 이주사업이 본격화 된다. 1985년 이주대책사업이 확정·공고된 이후 1986년 여천동, 1987년 매암동, 1988년 부곡동, 황성동, 용연동, 용잠동 순으로 이주사업이 진행됐다. 

공해에 시달려온 주민들의 건강은 구했지만 졸지에 정든 고향집과 땅을 버려야 하는 실향의 아픔을 남겼다.
 
지난 1960년대 이후 울산에서 없어진 마을은 모두 150여곳. 그 자리에 온산공단, 용연공단, 석유화학단지 등 수 많은 공업지대가 대신 들어섰다. 자동차 공장과 거대한 조선소도 들어섰다. 이를 위해 자신의 집터를 내준 사람들이 4만여 명에 이르고, 공업용수, 생활용수를 위해 건설한 4개의 댐 때문에 생겨난 수몰민도 수백명 가량 된다.
 
철조망을 앞에 두고 오도 가도 못하는 남북의 실향민도 아니건만 울산의 이주 실향민들은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렸다. 전우수기자 jeusda@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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