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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소리 - 피아노

                                      도순태
 
소리 내는 악기였을까
피아노 위에 앉은 먼지를 보며
아침부터 벌써 몇 번을 생각한다
소리 내는 것은 소리 나야 하고
꽃은 피어야만 아름답다
겨울 내내 구석에서 제 소리 잊어버린
어깨쯤 상처가 있는 피아노
저 몸속에 있는 수많은 음률의 길
혼자 날마다 걸어갔으리라
검은 건반 하얀 건반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지어 가다가 간혹 반 박자 쉬기도 했으리라
어느 날 반올림되어 빨리 갔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손닿을 때 온몸 전율하면서
높은 도처럼 고함도 질렀을 것이다
세상 속으로 퍼져 들리지 않는 소리
나뭇가지 일렁이는 바람처럼
맑은 길 가고 싶었을 내 안의 음계
 
△도순태 시인: 200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난쟁이 행성』 울산작가회의 올해의 작가상 수상, 봄시 동인.
 

김감우 시인

소리를 잠그고 지내기는 우리 집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이 시를 읽으며 내 피아노 뚜껑 위에 있는 물건들을 본다. 폭염 받아내던 양산과 우편함에서 뽑아 온 주민세 고지서, 차안에서 마시던 물통, 그 옆에 가방까지. 나의 어제를 기록한 일기장처럼 펼쳐져 있다. 언제부턴가 저 피아노는 내 동선의 현재형이 되었다. 누군가 보내온 봉인된 시집 한권이 얹히기도 하고 짝 없는 양말이 제 짝을 기다리기도 하고, 광고지도 빼지 못한 채 조간신문이 얹혀 있기도 하다. 

수 년 째 소리를 잊은 혹은 잃은 그는 묵묵히 내 속도와 무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늘 제자리를 찾아 어딘가로 가고 있는 불안이고, 잠시 쉬어가는 헐떡거림이다. 혹은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내일 새벽을 얹어둘 때도 있으니 건망증의 염려까지 나누자고 한 셈이다.

며칠 전 다녀간 딸아이가 그 뚜껑을 열었다. 비로소 나의 현재를 잠시 치우고 피아노의 소리를 들었다. 건반 하나가 소리가 나질 않았다. 오랜만에 신청곡을 연주해 줄 행복한 시간을 기대했으나 전문가의 조율을 받아야 한단다. 미안했다. 내 집 안에 있는 물건이니 나를 위한 쓰임만 생각하느라 피아노의 입장은 헤아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시가 나를 일깨워 준다. 무심히 대하는 사물들도 그 존재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아침이다. 나의 쓰임이나 소유물로서의 관계 뿐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그 본연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

시에서는 피아노 위에 앉은 먼지를 보며 "소리 내는 악기였을까" 라고 첫 행을 열어 두고 "아침부터 벌써 몇 번을 생각하"고 있다. "검은 건반 하얀 건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피아노가 내던 소리의 길을 기억해 쓰다듬으며, "줄지어 가다가 간혹 반 박자 쉬기도 했으리라"는 피아노의 호흡까지 헤아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맑은 길 가고 싶었을" 스스로의 내면에 저장된 음계를 만나며 시를 마무리 할 수 있는가 보다.

아직 폭염이지만 오늘은 새벽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느꼈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깨 쪽에 상처가 있다던 시인의 그 피아노는 이제 뚜껑을 열었을까? 그래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나 이흥렬의 바위고개 한 곡 쯤을 연주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침부터 기를 쓰고 울어대는 저 매미소리에게 또 한 계절을 양보하며 몸속으로 소리를 좀 더 가두고 있을까.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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