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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기는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유배 죄인을 수용한 고립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뿌린  학문과 예절의 씨앗은 벽지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장기읍성에 서면 발아래 신창들판과 동해바다가 발아래 펼쳐진다.
포항 장기는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유배 죄인을 수용한 고립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뿌린 학문과 예절의 씨앗은 벽지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장기읍성에 서면 발아래 신창들판과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포항 장기는 유배의 땅이었다. 조선시대 149회 200여명이 장기로 떠밀려와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제일 많은 숫자다.
사형 다음으로 중형이었던 유배는 죄의 경중에 따라 한양과의 거리로 유배지를 정했고 장기는 그 중 두 번째로 먼 등급의 길이었다. 제주, 거제, 흑산도가 가장 먼 길이었고 떠나온 이들은 남은 생애를 장담하지 못했다. 사화와 당쟁으로 희생양이 된 그들의 먼 길 끝에는 공포와 절대고독만이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난의 땅에서 희망을 쏘아 올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변화 없는 삶을 지탱해준 것은 끊임없는 내면으로의 탐구였다.
전남 나주에서 2년여의 시간 끝에 조선 건국의 밑그림을 그린 삼도 정도전, 9년간의 제주 유배에서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 때론 신분을 버리고 어부와 하나가 돼 자산어보를 완성한 정약전 등이 그들이다. 장기로 유배 온 대표적인 이는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이들은 후일 변방의 작은 고을 학문과 예를 꽃피운 밑거름이 됐다.

# 뛰어난 일출 자랑하는 장기읍성
울산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오르다보면 경북 포항 양포항 언저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장기읍성이다. 장기는 경주 동쪽 외곽에 자리한 탓에 신라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성이 존재했고, 고려 현종 때 옛 성 북쪽에 새로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장기읍성은 산성의 기능을 겸한 읍성으로 해발 252m의 동악산에서 동쪽해안으로 뻗어 내려오는 지맥의 정상에 자리한다. 멀지않은 신창리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1011년 고려 현종 2년에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해 쌓은 토성을 조선조 1439년(세종 21년) 왜구의 침입에 대비, 석성으로 재축성한 후 군사기지로 이용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2,980척(약 1,392m), 높이 10척으로, 성내에는 우물 4개소, 못 2개소의 기록이 남아있다. 성의 규모는 현재와 별 차이가 없으나 일제강점기 성내 모든 관아 건물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향교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다 최근 들어 성의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동서로 길쭉한 긴 형상으로 산 정상에 자리한 장기읍성은 가까이는 정기천을 낀 벌판을 지나 멀리 신창 앞바다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적의 출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읍성에 서면 새벽 일출이 장관으로 펼쳐진다. 경주 양동마을이 낳은 3현 중 한사람으로 알려진 회제 이언적이 '장기동헌'이란 시를 통해 칭송하기도 했다.
 
장기천을 따라 동해로 발길을 옮기면 신창 해변이다. 해변에는 드물게 우뚝 솟은 갯바위가 자리하고 그 위에 뿌리내린 소나무들이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일출암이라 이름 지어진 바위를 딛고 해가 떠오르는 장면은 육당 최남선이 '조선 10경'에 꼽을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문득 척박한 바위 위에 수 백 년의 시간을 인고하며 푸름을 자랑하는 소나무의 생명력이 그 옛날 유배당한 이들과 닮지 않았을까 생각이 스친다. 

 

장기로 유배온 이들의 족적을 찾는 유배문화체험촌.
장기로 유배온 이들의 족적을 찾는 유배문화체험촌.

# 주자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
1675년 6월 장기로 내려온 우암은 장기성 동문 밖 마산리 오도전의 집에 위리안치(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둘러 그 안에서만 생활하게하는 유배) 됐다.
 
우암은 당시 노론의 영수였고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주자학의 대가였고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좌의정 재직 시 인선왕후의 복상문제가 빌미가 돼 윤선도 등 남인에게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고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남인 삼사의 맹공으로 다시 포항 장기로 이배된다. 우암은 그렇게 4년여를 장기에서 보냈다.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가는 시간은 더디갔다. 우암은 마당에서 산책할 때면 그림자조차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 조심했고, 아녀자들에게도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글을 깨우치게 했다. 장기로 이배당시 먼 길을 함께 온 정부관리의 안위를 먼저 물어 볼만큼 인정 있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1679년 거제로 이배되기까지 우암이 이곳에서 보낸 유형의 시간은 인근 선비들에겐 학문의 줄기를 열어주는 자양분 같은 것이었다. 주자학의 대가이자 기호학파의 주류의 그늘아래 사사받고자하는 많은 이들은 그를 추앙해 찾았고 국방의 오지로 궁핍한 삶을 이어가던 곳에서 빛나는 학문의 길과 예절의 숭상을 열었다.
 
사람들은 후일 우암을 뜻을 새겨 죽림서원을 세우고 그 길을 이어나갔다. 오도전은 우암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그의 행적을 기록한 '송시열선생적거후기(宋時烈先生翟車後記)'를 남겼으며 후일 훈장으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이 장기로 유배와 심었다는 은행나무,  지금도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서 그 푸름을 자랑한다.
우암 송시열이 장기로 유배와 심었다는 은행나무, 지금도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서 그 푸름을 자랑한다.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우암은 다시 중앙정계로 나갔으나 3년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성격이 과격한 우암은 쇠락한 남인을 향한 적개와 증오로 제자 윤증과 대립한다. 이들의 갈등은 결국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됐다.
 
우암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도 중앙정계를 움직였고 1689년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됐다. 그는 '인통함원부득이 함소입지(忍痛含寃不得已 含笑入地) 아픔과 원통함도 부득이한 일, 웃으며 땅 속에 들어가노라'고 말한 다음 천천히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장기초등학교 교목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우암이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300여년의 시간을 건너온 은행나무는 그 수형이 쇠약해졌지만 아직도 하늘로 솟은 가지에는 봄이면 푸른 잎을 틔우며 가을에는 노랗게 물들여 그 생명을 증명하고 있다.
 
# 유배문학의 틀을 닦은 다산 정약용
100여년이 흐른 후 마흔에 접어든 다산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정약용은 1789년 정계에 입문했으나 서학을 추앙한다는 이유로 간단없는 유배의 삶을 지냈다.
 
그런 그를 한없이 품은 것은 정조였다. 남인 공서파의 탄핵으로 유배를 갔지만 정조는 그를 10일 만에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동서로 긴 지형을 따라 축성한 장기읍성. 북문에 서면 저멀리 유배문화체험촌이 발아래 보인다.
동서로 긴 지형을 따라 축성한 장기읍성. 북문에 서면 저멀리 유배문화체험촌이 보인다.

정조가 정약용을 신뢰했던 이유는 아마 그가 항상 새로운 세계와 만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다산이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등과 더불어 서학을 신봉했다고 문초를 당하고 끊임없이 상소가 올라와도 정조는 정약용을 용서했다. 그때 다산은 "자신이 서양의 사설에 일찍부터 빠져든 것은 천문(天文) 역상(曆象) 농정(農政) 수리(水利)에 관한 기구와 측량하고 실험하는 방법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매혹됐"음을 고백했다.
 
정조는 그런 정약용에게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이 싹트듯 하고 종이에 가득 열거한 말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사직하지 말라"며 보호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물러나고 이듬해 순조 원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산은 장기로 유배됐다. 이른 봄이었다. 다산의 처소는 당시 장기 장교였던 성선봉의 처소로 현재 마현리로 추정된다. 
 
다산은 장기에서 《이아술(爾雅述)》6권과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는데, 서울로 압송 때 분실되고 현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여름에는 성호가 모은 100마디의 속담에 운을 맞춰 지은 《백언시(百諺詩)》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산이 장기에서 독서와 책 쓰기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에도 조정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대신들은 신유박해에서 참형을 면하고 유배를 간 정약용 형제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해 가을 다산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제천에서 서학의 수괴로 붙잡혔다. 청나라 황제를 통해 박해를 멈추게 해달라는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의 품에서 나왔다. 정적들은 다산 형제들의 추국을 다시 상소했다. 
 
결국 전국 각지로 유배됐던 서학 연루자들이 한양으로 압송돼 추국을 당했다. 유배의 삶 구석에 고립된 이들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이치훈은 제주에, 정약전은 흑산도에,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명했다. 삼사에서 번갈아 상소하면서 "유배보다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순조는 따르지 않았다.
 
약용과 약전은 한양에서부터 함께 출발해 나주에 도착하고 밤남정 주막에서 마지막 이별을 했다.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다산은 초당에 자리를 잡고 18년 간 학문에 몰두해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석방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74세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가 장기에 머문 것은 7개월 남짓이지만, 안으로 치열했던 그의 삶이 유배문학으로 승화된 첫 자리는 장기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신창해변의 일출암. 척박한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장관이다.
신창해변의 일출암. 척박한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장관이다.

# 우암과 다산이 걸었던 사유의 길
장기는 그들에게 고립의 땅이었으며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벽지였다. 회한과 눈물의 땅이었지만 그들은 사유와 책속에서 길을 찾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유배문학을 탄생시켰다.
 
포항시는 이들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고자 유배문화체험촌을 지었다. 또 장기읍성과 연계해 다산과 우암의 길을 만들고 둘레길을 조성했다.
 
단순히 꾸며진 시설 몇 개로 그들의 암울했던 시간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조선의 변방에 꽃 피운 학과 예를 되짚어보는 일은 의미 있을만하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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