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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방어진항 전경. 뉴비전아트포럼 제공
울산 방어진항 전경. 뉴비전아트포럼 제공

울산에서 방어진은 외딴섬 같은 존재였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방어진 출장소가 동구로 승격한 이후에도 동구는 늘 방어진으로 통했다. 지금도 여전히 동구는 방어진이고 방어진은 동구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지만 방어진은 전형적인 어촌이다. 질펀한 바다 냄새와 고기잡이배, 왁짜한 어민들의 육감적인 말투가 어촌 풍경을 그려내는 곳이 방어진이다.
와딴섬 같은 방어진의 본모습은 속살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달라진다. 하늘에서 버라본 방어진은 백두대간의 끝자락, 옹골찬 산세가 동해로 달려가는 활짝 펼쳐진 형상이다. 마치 영험한 대륙의 기운이 바다를 향해 위세를 떨치는 장엄한 모습이다.

그래서 방어진 일대는 천하절경이 즐비했다. 대륙의 옹골찬 기운이 동해로 뻗어나가는 끝자락에 대왕암 공원이 있고 살짝 돌아선 곳이 일산진이다. 지금은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들어섰지만 이 일대는 신라 천년의 경승지로 역대 왕들의 여름별장 같은 영험한 땅이었다.

# 신라 왕들이 대대손손 즐겨 찾던 여름별장 같은 곳
울산동구향토사연구회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대왕암 일대에서 문무대제라는 제례의식을 하고 있다. 문무대제는 대왕암이 바로 문무대왕의 수중왕릉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동구 향토사연구회는 문무대왕 수중왕릉의 근거로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된 문무왕의 비석 문헌을 든다. 비석 뒷면 비문에는 "경진에 수장하라"고 했는데 경진이 바로 고래 '경'자와 나루 '진'자를 쓴 방어진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울산 앞바다는 예로부터 고래바다 경해(鯨海)로 불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왕암 공원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방어진 사람들은 대왕암과 그 주변을 그렇게 영험한 땅으로 여겼다. 어풍대·고늘개·놀이창·여기암·대왕암 등에 얽힌 지명의 유래나 전설을 살펴보면 방어진은 오래전 신라의 왕들이 대대손손 즐겨 찾았던 여름별장 같은 곳이었다.

1926년 선박들이 정박중인 방어진항. 동구 제공
1926년 선박들이 정박중인 방어진항. 동구 제공

# 세종 7년 편찬 '경상도지리지' 국방 요충지로 첫 등장
방어진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세종 7년(1425)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인데, 즉 국방 요충지로서 '방어진(方魚津)'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거명되고 있는 것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삽입된 염포지도에 '방어진목장(牧場)'이라 쓰여 있다. 방어진을 예전에는 '방어나리'라고 불렀는데 나리(津)는 내(川)의 한 별형(別形)으로 사람이 사는 터전 내지 땅이니 즉 마을을 일컫는다.

# 왕과 궁녀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던 일산진
대왕암공원을 옆으로 끼고 돌면 은빛을 드러내는 일산진이 나온다. 여기서 일산이라는 이름 역시 신라 때 이곳으로 유람 온 왕이 일산(日傘)을 펼쳐놓고 즐겼다는데서 비롯된 것인데, 뒤에 일산(日山)으로 변했다고 한다. 일산진 마을 앞바다에는 작은 바위섬이 있다. 민섬, 혹은 미인섬으로 불리는 이 섬은 신라 때 왕실에서 궁녀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데서 유래됐다. 그 모습이 마치 꽃놀이 하는 것 같다고 부르게 된 이름이 '화진'이다. 이 꽃놀이 하는 바닷가의 뜻을 가진 '꽃놀이 갯가'가 '고늘개'가 됐고 이것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 '화진(花津)'이다. 원래 고늘개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150여 년 현재 위치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이 고늘개 동쪽 바닷가에서 신라왕 일행이 춤추며 놀았던 곳을 '놀이창'이라고 한다.

# 동구 역사와 지역적 특성 그대로 담은 전형적인 어촌마을
방어진은 동구의 역사와 지역적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다. 동구 시가지를 지나 방어동의 주택가를 거쳐 방어진항으로 들어오면 탁트인 바다와 함께 어촌항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촌의 바다 냄새와 고기잡이배, 어민들이 바삐 움직이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삶을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방어진항은 동구가 조선산업 도시 이전에 바다를 끼고 있는 어업도시라는 것을 알게해 준다. 한때 수산업과 철공업의 번성으로 지역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방어진은 어업의 쇠락기를 맞아 한동안 침체됐으나 최근 다시금 해양관광의 중심지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방어진 유곽거리 모습. 1933년 울산군 향토지
일제강점기 방어진 유곽거리 모습. 1933년 울산군 향토지

# 100여년 전 아시아 수산업 중심 역할…포경으로도 유명세
100여년 전 쯤 방어진은 아시아 수산업의 중심지였다. 한반도를 일제가 강점한 이후 방어진에는 일본 오카야마현 히나세 어민들이 집단촌을 이루고 살았다. 특히 1920년대 중반에 방어진 인구는 3만명이나 됐고, 학교와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있어 당시에도 지역에서 가장 번영했다. 사실 이같은 일본인의 영향은 조선시대 삼포 개항이라는 교역의 증거로 남아 있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 삼국시대부터 대마도에 근거를 둔 왜구의 집중적인 노략질 대상이었던 곳이 방어진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 쪽 기록에도 방어진은 한반도 남쪽 최대 어항으로 주 어로 대상은 고등어잡이였다. 일본인의 어업기지였던 방어진은 해방이후 '동양포경회사'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고래잡이 전진 기지로 탈바꿈했다. 러시아에 의해 개척된 장생포 포경산업보다 후발주자였지만 한때는 포경 규모가 장생포를 앞선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방어진의 옛모습에는 포경선과 고래가 입항하는 모습이 가슴을 뛰게 하고 있다.   
 김진영 편집국장 cedar0930@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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