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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300년 죽어서 600년을 버티어 밴 데드 블레이(죽음의 호수)의 나무. ⓒ서영교
살아서 300년 죽어서 600년을 버티어 밴 데드 블레이(죽음의 호수)의 나무. ⓒ서영교

 캠핑이 며칠간 이어지면 나를 위해 준비된 안락한 침대가 그리워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잘 마련된 잠자리일수록 기억은 희미하다. 집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게 되면 그곳을 채울 것들이 필요하게 되고 한때 그것이 즐거움이 되지만, 이내 채워진 것들이 나를 구속한다. 애초에 내가 원했던 것은 그것을 멋지게 만들려는 내 욕심에 묻혀버린다. 캠핑을 하며 그것을 느낀다. 내게 필요한 것은 숟가락이고 커피 한잔이며 모닥불이었다는 것을. 그외의 것들은 모두 모닥불의 원 밖에 있는 어두운 숲이다. 있으나 없으나 사실은 같은 것이다. 모닥불의 따뜻한 빛은 그 빛이 닿는 공간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겁없이 다가오는 케이프크로스 물개 보호구역의 어린 물개들 강아지처럼 귀엽다. ⓒ서영교
겁없이 다가오는 케이프크로스 물개 보호구역의 어린 물개들 강아지처럼 귀엽다. ⓒ서영교
 
 
# 비릿한 삶의 현장 케이프크로스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 끝없는 사막이 시작되고 저멀리 신기루들이 보인다. 땅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키작은 나무들만이 흘러가는 바람을 붙잡아 작은 모래언덕을 만들어 마치 바다위에 작은 섬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 길의 끝에 바다가 보인다. 대서양이다. 여기서부터는 바다를 끼고 북상해 케이프크로스 물개 보호구역으로 향했다. 

물개가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역한 비린내가 진동한다. 바다의 물냄새와 물개의 체취, 똥냄새에 사체 썩는 냄새까지 뒤섞여 강렬하게 대지를 장악하고 있다. 해안을 수만 마리의 물개가 뒤덮고 있어 마치 땅이 꿈들대는 것 같다. 워낙 개체수가 많다 보니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는 어린 것들은 어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럼 보통 죽는다. 치워주는 이가 없으니 죽은 것들은 산 것들과 뒤섞인 채 시간에 맡겨진다. 언뜻 아비규환인 것도 같고 활화산 같은 생명의 충동 같기도 한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서로 끊임없이 뒤엉키는 것들은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 같기도 한데, 그 속에서 유선형의 몸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한껏 머리를 치켜든 수컷. 순간 물개의 미소를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김영하는 그의 소설에서, 삶이란 젖은 우산이 몸에 달라붙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했다. '비린내를 풍기는 동안만 삶이다.' 이 비린내는 이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월비스 베이의 부두에는 요트와 갈매기와 펠리칸이 저마다의 궤도를 그리며 어지럽게 뒤엉킨다. 선착장의 가장 높은 나무기둥에 내려앉은 펠리칸은 발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을 심판관의 냉엄한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배가 달리면 물개가 따라서 경주를 하고 배가 속도를 줄이면 배 위로 뛰어 오른다. 펠리칸도 제 집인 양 사람들 사이로 섞여든다. 쉽게 먹이를 얻고자 하는 요령좋은 놈들일 수도 있지만, 인간과의 경계가 이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이 보기 좋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월비스베이의 펠리칸. ⓒ서영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월비스베이의 펠리칸. ⓒ서영교

월비스 베이의 라군에는 플라밍고가 모여 있다. 여린 몸에 바람을 이기기 위해 서로 몸을 붙이고 머리까지 동그랗게 말아넣은 채 바람을 견디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지켜보는 내게는 마치 수면 위에 뭉게구름이 낮게 떠있는 것 같다. 힘들 때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법이다. 솜사탕에 꽂혀 있는 나무젓가락 같은 가녀린 다리는 걷고 있는 것인지 바람에 밀려가고 있는 것인지, 보는 곳과 진행방향이 제각각이다. 마침내 걷기를 포기하고 날개를 펼치면 연약하게 여겼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위엄있는 날개에 놀라게 된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도 바람이지만 그들이 날 수 있는 근거도 바람이다.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미브 사막
사막에 이르기 전에 그린과 레드의 호수가 보인다. 호수가 이런 색을 띨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염전이라고 한다. 갇힌 바닷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박테리아에 의해 서서히 붉어진단다. 한국에서 염부들은 소금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소금이 온다'고 한다. 피부를 파고드는 태양의 살기를 버틴 물이 시간의 터널을 지나 그 속에서 소금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이라는 나미브 사막이 시작하는 곳이다. 가이드를 맡은 할아버지가 나미비안 마사지를 아냐고 묻는다. 차를 타고 사막을 달리면 덜컹거리며 길이 마사지를 해준다는데, 웬걸 예측불허의 충격들에 척추가 비명을 지른다. 준거점이 없이 모래능선이 이룬 초현실적인 선들과 파란 바탕만이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릴이 이탈하려는 현실감을 겨우 붙잡아둔다. 그 길의 끝에서 갑자기 바다가 시작된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양 극단의 경계에 서게 된 나는 하릴없이 셔터만 눌러댄다. 모래의 파도와 물의 파도가 만난다.

사막의 뜨거운 모래 속 세상 귀여운 도마뱀. ⓒ서영교
사막의 뜨거운 모래 속 세상 귀여운 도마뱀. ⓒ서영교

가이드 영감이 가만히 모래를 응시하더니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놀라운 것이 나온다. 도마뱀이다. 사막은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라는 생각은 나의 선입견에 불과했다. 뜨겁고 메마른 모래 속에서 찾아낸 도마뱀의 세상 귀여운 얼굴과 투명한 피부는 충격이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생명의 비장함 같은 걸 말하려면 최소한 전갈 같은 비쥬얼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어둠이 내린 붉은 사막을 밝히는 별빛. ⓒ서영교
어둠이 내린 붉은 사막을 밝히는 별빛. ⓒ서영교

# 죽음의 호수서 바라본 일출
이제 나미브 사막의 하일라이트인 데드블레이가 있는 세스림으로 간다. 세스림. 주인의 언어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란 뜻이다. 이곳은 붉은 모래와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새벽 4시 30분, Dune 45를 향해 출발. 듄 45는 세스림 게이트로부터 45㎞ 떨어져 있다는 뜻으로, 일종의 주소이자 이름이다. 수많은 사구들이 이런 식으로 이름붙여져 있다. 형태를 완결짓지 않고 정착하지 않는 것에 주소가 있다니 새삼 나의 굳은 머릿속이 울린다. 많은 이들이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고자 부지런히 걷고, 바람은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지운다. 이윽고 해가 떠오르며 모래가 잠에서 깨어 붉게 타오른다. 사막은 바람이 만든 예술이다. 햇빛이 명암의 대비를 만들듯이 바람은 그것에 맞서는 모래와 등지는 모래를 칼날처럼 갈라놓으며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 놓았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래가 이룬 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래가 곧 바람인 것이다.

내 발목을 집어 삼키는 듯한 모랫길을 한참을 걸어 가니 붉은 모래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분화구같은 하얀 땅이 눈에 들어 온다. 그 땅에 말라 죽은 나무들이 서 있는 모습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장관을 이룬다. 데드 블레이. 죽음의 호수라는 뜻이다. 원래는 강이었으나 대서양의 모래바람이 강의 출구를 막으면서 강은 호수가 되었고, 그 호수의 물이 증발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 불과 600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생명의 강이 죽음의 땅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 나무. 살아서 300년, 죽어서 600년을 산 이 나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이제 나미비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돌아갈 일만 남았다.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래 언덕에 바람과 태양이 만드는 아름다운 선이 있는 곳, 나미브 사막.  나미브는 나마 족의 말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모래 언덕에 바람과 태양이 만드는 아름다운 선이 있는 곳, 나미브 사막. 나미브는 나마 족의 말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서영교
서영교<br>class614@naver.com <br>1971년생, 현 CK치과병원 원장<br>울산대 평생교육원 사진창작반 수료<br>​​​​​​​단체 및 그룹전 7회
서영교
class614@naver.com
1971년생, 현 CK치과병원 원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사진창작반 수료
단체 및 그룹전 7회

백인이라면 편지에 예쁜 말을 써서 보내고 싶으면 이렇게 쓸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아프리카인은 없다. 하지만 나 역시 아프리카를 잊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별빛만이 비추는 붉은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무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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