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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겸 편집국장

일요일 아침, 공영방송의 북한 프로그램에서 김정은이 웃고 있었다. '난닝구' 패션 운운하는 아나운서의 말꼬리가 흔들렸지만 난닝구 뒤에서 격렬하게 환호하는 군중의 손사래가 모두를 덮어버렸다. 세상이 뒤숭숭하다. 코로나19는 다시 기세등등하고 연이은 태풍에 초토화가 된 남부지방엔 추석 앞에 또 태풍이 덮칠거라는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린다. 사정이 이쯤되면 세상이라도 차분해야 할 법도 한데 우리 정치권은 연일 삿대질에 패악질까지 염천더위가 여전하다.

김정은은 수해 현장을 방문하며 난닝구 차림으로 쇼를 했지만 트럼프의 입을 빌리면 극악무도한 인간이다. AFP 통신은 '워커게이트' 주역 밥 우드워드 기자의 책을 통해 트럼프와 김정은의 은밀한 밀담을 소개했다. '분노(Rage)'라는 제목의 책을 미리 펼친 셈이다. 이 책에는 지난 2013년 숙청된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에 대한 밀담이 있다. 김정은은 고모부를 숙청한 뒤 그의 머리 없는 시신을 북한 관리들에게 공개했다. 우드워드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김 위원장은)나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면서 장성택 사례를 들었다. "그가 고모부를 죽인 뒤 시신을 북한 간부들이 이용하는 건물 계단에 놓았다. 잘린 머리는 가슴 위에 놓았다"고 알렸다.

김정은의 또다른 일면도 소개했다. CIA 분석가들이 그동안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27통의 친서를 분석한 결과 김정은의 '아부신공'이 작렬했다고 결론지었다는 내용이다. 분석가들은 "김정은은 친서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스스로 역사적 중심 무대에 오른 느낌을 주면서, 정확한 아첨의 핵심을 찌른 기술에 경탄했다"며 "트럼프가 김정은 아첨에 완전히 넘어갔다"고 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8년 12월 25일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에서 '각하(Your excellency)'란 표현을 9번이나 쓰며 "전 세계가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가운데 아름답고 성스러운 장소에서 각하의 손을 굳게 잡은 그 역사적 순간(2018년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2차 정상회담과 관련해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저와 각하의 또 다른 역사적 만남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전 세계가 다시 한번 보게 될 것"이라며 트럼프에게 "위대한 결단력과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 달라고 아부했다.

밥 우드워드의 폭로기사를 읽으며 오늘 아침 공영방송에서 웃고 있던 김정은과 '난닝구'가 오버랩 됐다. 잠시 우리쪽 통일부 장관 이야기를 해보자.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김정은을 돕기 위한 여러 제안을 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는다며 "남북이 주도하고, 국제사회와 협력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피력하기도 했다.

김정은이 누군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세습왕조의 후예이자 골수까지 빨갱이인 김일성 독재왕국의 살아 있는 유산이다. 김정은의 왕조세습 과정은 피의 역사다. 1인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 패악을 마다하지 않은 할아비를 흠모하는 자가 김정은이다. 피 냄새를 따라 킁킁거렸던 할아비를 닮아 고모부 장성택을 찍어내고 독재의 축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세월 김정은은 군부와 노동당의 절대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며 수시로 핵을 쏘아올려 왕조의 세습 완성을 자축했다. 문제는 국제사회의 오래된 제재와 코로나19라는 또다른 악재 때문에 패악질과 핵놀음의 돈줄이 막혔다는 점이다. 외화벌이와 해킹, 강제노역으로 거둬들인 돈줄은 역겨운 뱃살을 유지하는 자금줄이지만 그 모든 것이 막혀버리자 다른 장면의 변신이 필요했다. 그 방법이 바로 체제 단속이다.

집권 기간동안 김정은은 다양한 방법으로 외화벌이를 독려했다. 지난 2014년 소니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해 2016년 방글라데시 중앙은행 등 세계 각지 금융시스템을 해킹했고, 지난해 5월 150여 개국 30여 만 대의 컴퓨터에 피해를 입힌 랜섬웨어 워너크라이, 한국 가상화폐 거래소를 해킹해 자금을 빼돌린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제재국면 속에서도 북한은 40개 외국 영사관을 통해 외화벌이를 이어나가며 지저분하고 치졸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복병은 김정은의 여유를 짓뭉갰다. 그러자 굳건한 체제 유지가 관건이 됐다. 체제 유지에 기본은 봉쇄와 자신감이다. 국경을 막고 내부단속에 나섰다. 그리고 부족한 외화벌이는 해킹 부대를 총동원했다. 외근에도 북한의 해킹 부대는 허술한 외국은행과 거래소를 털어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는 보도가 잇따르는 이유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한민국은 김정은에 우호적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로 괴뢰 수괴가 귀염둥이가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좌우든, 진보든 보수든 결국은 우리 민족 아니냐며 동참하라고 툭툭 던진다. 동참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니란다. 그 분위기를 만든 쪽이 대한민국 방송이다. 이명박이 전문가 그룹의 반대를 우기고 허가한 좌편향 방송과 국민의 혈세가 무한 투입되는 공영방송이 남북 화해의 일등공신이 됐다. 이상하고 신비로운 이념 물타기가 일상화 됐고 남북은 하나라는 구호는 이제 라떼 수준의 오래된 농담이 됐다. 어쩌다 김정은이 귀염둥이가 되고 북한의 도발징후는 양치기 소년의 외침이 됐는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 사회는 어느새 그렇게 젖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주말 느닷없이 국회 국방위원회 여당 간사가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황희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그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휴가 특혜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한 당직사병의 실명을 거론하며 "산에서 놀던 철부지의 불장난으로 온 산을 태워먹었다"고 막말을 했다. 그는 또 "(당직사병)언행을 보면 도저히 단독범이라고 볼 수 없다"며 "당직사병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며 공범세력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쩌다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 여당쪽 대표가 일개 군 사병을 잡고 목청을 높이는 상황까지 돼버렸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이다. 코로나19가 재확산 추세에 있고 태풍이 잇달아 남부해안을 때려 초토화가 됐지만 우리 사회는 일개 법무장관 아들이 지난 여름 휴가 미복귀 논란으로 연일 삿대질 중이다. 한심한 대한민국, 애처로운 국가 시스템이다.

대한민국은 신흥 귀족사회에 접어들었다. 강남좌파이거나 강남좌파와 가까운 자들은 진골이거나 진골 비스무리한 귀족계급이고 부엉이 그룹이거나 올빼미 정도만 해도 성골그룹 언저리에서 목을 빼고 다닐 수 있는 사회가 됐다. 그래서 진골이나 성골 언저리를 건드리면 무차별 총알세례는 각오해야 한다. 바로 추미애 장관 아들을 건드린 케이스가 이 경우다.

강남좌파 호위병들과 부엉이나 올빼미 유사종의 속사포는 그래서 시작됐다. 첫 번째 사수로 나선 이가 신입 귀족 김남국 의원이다. 그는 모 방송에 나와 추 장관 아들 '특혜 휴가' 의혹과 관련해 "보좌관이 전화를 했다는 것 자체는 부적절하지만 외압 대상이 될 것도 아니다"고 주장했다. 부적절함을 슬쩍 건드리며 외압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그의 발언은 스탭이 꼬였다. 그 때부터 문제는 일파만파가 됐다. 신입귀족의 첫 사격이 오발탄이 되자 노련한 일등 사수 정청래와 설훈이 나섰다. 정청래 의원은 "식당에서 김치찌개 시킨 것을 빨리 달라고 한 게 청탁이냐"고 엄호했고, 설훈 의원은 "군에 안 갈 수 있는 사람이 군에 갔다는 사실은 칭찬해야 한다"고 사오정 같은 말로 국민 분노를 샀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우상호가 거들었다. 우상호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카투사 자체가 편한 군대라 (추 장관 아들 의혹)논란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전국 카투사 현역, 예비역이 들고 일어나 우 의원의 사과를 촉구했다. 혹 때려다 두 개를 붙인 셈이다. 김정은이든 여권 인사든 모두가 스스로에 대한 자체 제어시스템이 망가진 형국이다. 어쩌면 스스로 오만의 파도에 올라타 갑질의 마스터베이션에 도취돼 있는 것 같아 딱해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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