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떠 있는 밤
해가 떠 있는 밤
  • 서아름
  • 2020.09.1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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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름의 클래식 톡] 서아름 피아니스트

넘치도록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글을 쓰다 멈추고 쓰다 지우고 다시 쓰려고 보니 어느새 더위는 사라졌다. 모든 게 순식간이다. 
 
너무 덥다. 더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의 연속이다. 그냥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 그 아래 드러누워 바람이 머릿속을 통과해 뇌까지 식혀주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계속되는 폭염주의보에 지쳐가는 어느 날 밤, 첫째 꼬맹이가 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나 펼쳐 보이며 “엄마, 이렇게 적어줘. 해가 떠 있는 밤"
 
해가 희미하게 떠 있고 별도 반짝거리는 그림 속에는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두 꼬맹이가 그려져 있다. 그림 속의 아이들 표정이 너무 예뻐서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예전에 엄마가 공부하던 마을에는 아주 더운 날엔 깜깜한 밤이 가끔씩 사라졌어." “정말? 우와~ 지금 가볼까?" “아니, 조금 멀어. 우리 다음에 꼭 가보자. 해가 떠 있는 밤이 있는 마을에" “웅. 근데 어땠어?"“ 음.. 피곤했어, 잠을 푹 못 잤거든. 그리고 계속 놀고 싶었어."
 
내가 공부했던 지역은 독일의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는데 여름에는 깜깜한 밤이 며칠씩 사라지곤 했다. 완전한 백야 현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럴 때면 연습을 끝내고 나오는 늦은 밤 도 그저 저녁 시간으로 느껴져 좀 더 놀다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더운 날엔 가끔 수많은 음표들을 표현해 내는 다양한 소리와 넘치는 감정들을 들으며 느껴내는 것도 지칠 때가 있다. 모든 것에서 덜어내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나는 너무 오래된 때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며 시대를 앞서 간 자신을 한 문장으로 너무도 정확히 표현한 프랑스의 작곡가, 음악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파격적인 음악을 선보인 <에릭 사티 : Erik Satie 1866-1925> 의 음악이 떠오른다. 자신의 음악은 집중해서 듣는 음악이 아니라며 가구 음악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BGM (back ground music) 배경음악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가구 음악' 이란 말이 너무 예뻐서 입으로 여러 번 읊조려본다. 가구 음악, 가구 음악. 예쁘다. 피아노를 쳐다보고 있으면 사랑스럽기보단 부담스러울 때가 많은 게 나의 속내다. 연습을 해야만 할 것 같고 더 잘 쳐야만 할 것 같고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단 생각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 피아노가 더 크고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데 오늘은 연습실 한편 놓여 있는 갈색 테이블 옆 갈색 피아노가 가구 음악이란 말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오늘따라 예뻐 보인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커피 머신이 놓여있는 갈색 테이블은 짝꿍이 예전에 취미로 만든 것인데 짝꿍 사무실 구석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게 안쓰러워서 내 연습실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 피아노가 슬픈 표정으로 멀뚱히 서서 부러운 듯 테이블을 쳐다보는 모습은 외면한 것 같아서.. 비단 피아노에만 갖고 있던 생각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나의 모습일 것이다. 감추고 싶던 속마음과 마주치자 내 마음에도 덜어내기가 필요하다.
 
무엇이든 넘치면 원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낭만 음악이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떨어질 때가 되었던 그즈음, 음악도 꾸밀 곳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더해져 넘쳐버릴 때 사람들은 거기서 덜어내기 시작했다. 에릭 사티의 노래가 만들어진 것도 그즈음이다.
 
이 생소한 작곡가 에릭 사티의 음악은 그의 음악인지 몰랐을 뿐 이미 들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흑백 화면 속 에디슨의 연설로 시작한 시몬스침대 광고는 이목을 끌기 충분했는데 그 뒤에 흐르던 사티의 <짐노페디>1번은 광고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정말로 그가 말했던 가구 음악으로 사용된 것도 너무 재밌었다. 
 
신비하고 몽롱한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가 궁금해지고 그의 몇 가지 일화들을 알면 그의 인생 전체가 궁금해진다. '아라이 만' 이 쓴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는 에릭 사티의 인생을 이야기 한 소설인데 너무도 읽고 싶어 샀는데 아직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다. 
 
선선한 바람이 분다. 순식간에 차가운 바람으로 바뀔까 봐 벌써 하루하루가 아쉽다.
 
내 뜻대로 계획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요즘 마음에서도 덜어내기가 필요하다. 마음속 무언가를 덜어내니 오히려 더 편안한 요즘이다. 모두가 기다려야 하는 날들. 하루하루 다가오는 그날,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준비는 해야 하는데.. 관객이 없어야 할 것 같은 무대. 마음에서 여러 가지를 비워낸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피아노가, 음악이 예뻐 보인다. 해가 떠있는 밤 하늘도 예쁘던 그 여름밤 <짐노페디 'Gymnopedie' >와 함께했다면 선선한 가을날 아침 알아들을 순 없지만 프랑스어가 춤추듯 노래하는 <당신을 원해요 'Je te veux' :에릭 사티>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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