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의 역사(中)
풍수지리의 역사(中)
  • 양삼열
  • 2020.09.15 19:52
  •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삼열의 생활 속 풍수이야기]
풍수지리학 박사/ 경주대 평생교육원 교수

지난 연재에서 우리나라의 풍수는 통일신라 말기에 선종계통의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중국풍수를 배워왔다고 했으나 중국풍수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시기는 자장율사(590~658)때이다.

자장율사는 서기 636년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7년 정도 그곳에 머무른 후 귀국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그가 귀국한 후 신라에는 풍수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게 된다.

왕릉지 선택에 있어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다녀오기 전 27代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26代 진평왕 까지는 왕릉에 풍수적 개념을 찾아보기가 힘드나 당나라에 다녀온 후 선덕여왕 이후부터의 왕릉은 풍수이론과 부합하는 곳에 위치한다.

또한 양택에서도 늪이나 연못을 메운 자리는 풍수적으로 볼 때 흉지 임에도 불구하고 진평왕 재임 시에 건립한 황룡사지는 늪을 메운 자리이고, 같은 시기 백제의 미륵사지는 연못을 메워 만든 터에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제대로 정립된 풍수이론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다녀온 후 풍수적 문제점을 발견하고 비보(裨補:풍수적으로 결함이 있는 곳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차원에서 왕에게 건의하여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자장율사의 당나라 유학기점을 기준으로 풍수의 적용사례가 곳곳에 더 있는 것으로 보아 도선국사에 앞서 자장율사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중국의 풍수를 도입하지 않았나 하는 학자도 많다. 자장율사(590~658)와 거의 동 시대인물인 원효대사(617~686)가 잡은 절터 역시 풍수적으로 명당이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고유의 지리사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생풍수다. 그 자생풍수를 신라 말 도선국사가 정리하고 거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이론풍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조합해 이루어 놓은 것을 도선풍수라고 한다. 이 도선풍수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풍수다.

이렇게 시작돼 발전돼온 풍수지리는 고려시대에 들어 풍수의 전성기를 맞는다. 고려의 太祖 왕건은 불교신앙과 지리도참설을 전적으로 믿고 의존했다. 후대 왕들에게 유훈으로 남긴 '훈요십조'는 풍수적 사고관념이 잘 나타나 있다.

'훈요십조'의 제2훈에서 절터는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보아 앞일을 예견하고 자리를 잡은 것이니 함부로 다른 곳에 사찰을 창건하지 말라. 제5훈에서 고려 개국은 삼한산천의 음우(陰佑)를 받아 이룩된 것이며,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만대지지(萬代之地)이므로 왕이 수시로 순례하여 머물러야 나라의 안녕이 유지된다. 제8훈에서 금강 이남의 산형지세는 배역한 모양이니 인심도 그러할 것이므로 그쪽 사람을 중용하지 말라고 유훈을 남길 정도로 풍수를 중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울산신문은 여러분의 댓글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침해.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는 댓글. 도배성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위배되는 댓글은 삭제 될수도 있습니다.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