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선에 머물다] 불법출국
[詩선에 머물다] 불법출국
  • 김감우
  • 2020.09.15 20:03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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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출국

                                                이성웅

내 여권을 품고 고요히 공항을 통과하셨다
평생 해외여행 한번 못하신 아버지,
비자 사진을 뒤지다 아버지를 발견했다
근엄한 얼굴로 며느리와 아들 속에 섞여 있다
그래서 가끔 꿈속에 드나드셨나 보다
4*5 사진 속에서 전생의 비자를 꿈꾸셨나보다
일곱 끈 붙이려 잠시도 맘 놓을 수 없었을
깡마른 표정이 안쓰럽다
씨엠립 앙코르왓트 혓바닥이 꼬이고
낯설어도 따라가고 싶은 모양이다
비행기를 타보고 싶은 모양이다
가끔 자식 맞이에 설레기만 했던 명절날
올해는 증명사진 한 장 품고 캄보디아로
따라가기로 작심하신 모양이다
한겨울인데 풍성한 무논을 보고
농번기 못자리 생각이 나신 걸까
좀처럼 얼굴을 펴지 않으셨다
오늘 밤 꿈엔
아버지 환한 얼굴을 만날 수 있으리라

△이성웅: 2006년 울산문학 신인상 수상. 시집 '엘콘도르 파사' '클래식 25시'. 울산문인협회. 시와 소금 회원.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 사진을 품고 출국장 앞에 서 있는 장면이다. 그의 행선지는 씨엠립 공항, 앙코르왓트라는 거대한 시간 속으로 향하는 일이니 이런저런 감정이 얼마나 많이 밀려올지 짐작이 간다. 스스로도 가장이 되어 그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서 근엄하게 계시는 아버지, 사진을 찍는 것도 낯선 일이었을 테니까 아마도 표정 또한 굳어졌다는 뜻일 게다.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랬다. 평생 해외여행 한번 못하시고 먼길 떠나신 아버지, 그 아버지의 사진 한 장 품고서 비행기를 타려니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죄송했으리라.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 앞에 아들은 여전히 철없는 어린 아이이다. 그래서 우리들 가슴속에 간직된 부모님은 곁을 떠나신 후에도 영원성을 갖는다. 오늘 같이 하늘이 텅 비게 푸른 날은 풍경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반짝임이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는 사진 한 장으로 버팀목이 되는 수호신이고 힘겨운 생의 고비마다 찾는 편한 품속인 것이다.

추석이 온다. 
비대면이란 말이 우리일상의 모든 행동에 수식어가 되어 따라붙고 있다. 수업도 회의도 택배도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국내를 오가는 일도 자제하며 지낸지가 세 계절이 되었다. 마스크 속에서 언어는 제 본래의 소리를 잃고 의사전달의 수단으로만 겨우겨우 숨 쉬고 있다. 파열음으로 소리치지 못하고 울림소리로 여운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시간이다. '말' 속에 깃든 소리의 섬세한 기능은 마스크를 통과하면서 웅웅거리는 바람소리로 평준화된다. 화자의 독특한 음색이나 억양까지를 다 포함해야 비로소 언어가 완전해지는 것인데 우울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다가올 추석도 가능한 이동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다. 조금만 더 견디면 출구가 보일 것이라고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보름달을 보며 기원하는 시간일 듯하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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