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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선 수필가

오지다 오지다 이보다 더 오질까, 빨랫줄에서 참깨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셨는지요? 쥐새끼 풀방구리 드나들 듯 하루에도 수십 번 현관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 참깨를 흔들고 들어옵니다. 어깨가 슬쩍만 스쳐도 챠르르~ 손끝만 닿아도 차르르~.

옆에 세워 둔 참깨털이 전용 싸리나무 막대기로 칩니다. 로또 당첨 사운드보다 더 듣기 좋은 소리로 또 챠르르르~ 챠르르르~!

흔히 '깨가 쏟아진다'는 말을 할 때 약간 비아냥처럼 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담 너머 지나가던 어르신이 본다면 충분히 배가 아플 만도 하기에.

인근에 놀이터 같은 텃밭 하나 마련해두고 날마다 발자국을 찍다가 올해도 참깨를 심었다. 작년에 재미를 보고 올해 또 심은 것이다. 두 고랑 심은 참깨로 제법 깨 터는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어른들 생전에 농사지을 때 도와드리느라 깨를 털어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그때는 노동의 개념으로 일을 했던 모양이다. 직접 심어서 거두기까지 완벽한 내 노력의 결과물이라 그런지 즐거움을 견줄 데가 없다.

언젠가 오밤중에 정선 카지노에 몰려가서 들었던 코인 게임기 아래 받쳐 둔 작은 양철통에 돈 떨어지던 소리보다 더 좋다. 이유는 불로소득을 노린 것에 대한 비난의 눈길과 내 노력에 대한 경외심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늦봄에 참깨밭을 만드느라 밑거름을 주고 골을 만들어 전용 비닐을 씌우고 씨앗을 넣었다. 참깨 알이 너무 작아 달랑 두세 개를 넣지 못하고 보통 여남은 개가 손가락 새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시간이 지나 새싹이 올라오면 두어 포기만 살리고 못난이들은 가위로 잘라 준다. 옳은 것만, 강한 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체험하라는 듯.

깨 모종이 실해져서 줄기가 어른 손가락만 하면 잎의 퇴색과 함께 맨 아래쪽부터 자연적으로 새 주둥이 같은 참깨 꼭지가 입을 연다. 아래서부터 두세 개가 입을 벌리면 그때가 베어야 할 적기다.

참깨 수확 시기는 잘 관찰해야 한다. 바쁘답시고 소홀하다 보면 아래쪽부터 터져 바닥에 쏟아버린다. 수확시기를 놓치면 바람 불 때 땅에 흘러버리기도 하거니와 새 떼가 어디서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지 새 밥 되기 십상이다.

잘 키워 둔 농작물을 호시탐탐 노리는 새 떼를 물리쳐야 하는 것도 농부의 사명이다. 새 떼에 다 뺏기지 말고 새 주둥이처럼 조삣조삣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베어서 성화 봉송 모시듯 들고 가서 볕 잘 드는 곳에 자리를 깔고 세워 둔다.

참깨를 베어 텃밭에서 말릴 때는 새들과의 전쟁이었다. 농막 컨테이너 안에 앉아 하릴없이 밖을 내다보다가 세워 둔 참깨대 위에 참새가 앉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누가 새 대가리라고 했던가? 바닥에 떨어진 것만 주워 먹을 줄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참깨대 위에서 흔들어놓고 내려가서 알갱이를 주워 먹는 게 아닌가.

나의 먹거리와 새들의 먹거리가 같다는 데서 경쟁을 하느라 날을 세운다. 앞 텃밭 주인은 골동품상에서 구한 옛날 학교 종도 치고, 새총도 쏘고, 화약도 쏘고, 심지어 바람에 번쩍이는 송골매도 높이 매달아 놓고 별별 짓을 다 했다. 나는 그 요란 대신 궁리를 했지만, 결국 싱싱하던 이파리가 웬만큼 기가 죽었을 때 새들과의 전쟁에서 백기를 들고 깻단을 집으로 껴안고 왔다. 둘둘 싸 온 참깻대를 볕 잘 드는 거실 앞 베란다에 세워보니 꽉 찼다.

타일 바닥에 농사용 부직포를 깔고 베어 온 깨를 한 묶음씩 묶었다. 다시 한 묶음짜리 세 개를 모아 윗부분을 또 묶어 아랫단을 벌려 세 갈래로 만들어 세웠다. 저들끼리 의지하고 기대서서 삼각대 사이로 나뉘어 쐰 바람 덕에 잘 말랐다. 깻단이 가벼워졌을 때 먼저 마른 순으로 빨랫줄에 거꾸로 매단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한여름 뙤약볕 탓에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면서도 깨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려고 자꾸 현관문을 열고 나가다 스치는 생각에 피식 웃는다. 자식 농사도 참깨 떨어지듯 저토록 확실한 수확물을 내놓는다면 모두 기를 쓰고 유난을 떨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세상 이치란 게 자식 농사도 참깨 농사도 심은 대로 거두어지는 것만은 아니란 것 또한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내가 너무 촐랑댄다 싶어 움찔해진다. 자식이 잘 컸다고, 참깨 떨어지는 재미가 좋다고, 오두방정을 떨 일만은 아니니 좀 더 처연해지자면서도 언행일치가 어렵다.

내내 흐리다가 볕 좋은 날 두어 시간마다 거꾸로 매달아 둔 깨를 두드리면 떨어지는 깨 쏟아지는 소리, 그것이야말로 참말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다. 클래식 음악 공연장의 찰찰이 소리 따위는 견줄 바가 못 된다.

깨 떨어지는 소리가 좋아 적금통장 들여다보듯 자주 내다보고 흔들어 댄다. 또 깨가 쏟아진다. 참깨 떨어지는 소리는 암만 들어도 참말로 좋다. 사는 일이 이토록 자주 재미나고 고소하다면 얼마나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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