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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조병화 시인: 경기 안성시 출생. 1921년 5월 2일~2003년 3월 8일. 쓰쿠바대학교 물리화학과 졸업.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53권의 창작 시집. 1974년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명예철학박사, 1982년 중앙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99년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이미희 시인
이미희 시인

가을은 그리움 속에 사는 것들을 조심스레 끄집어내고 싶은 계절이다. 깊은 숨결 어딘가에서 울긋불긋 돋아나는 흔적들이 어제 일처럼 가깝다. 춘난과 격동을 지나온 가을 하늘엔 파란 물이 티끌 없이 감돈다. 고개 들어보면 그리움이 그리운 것들을 불러내 가슴 깊은 곳에 우물을 판다. 한눈팔던 사이 우물처럼 잔잔히 물들어갔을 우리의 가을들. 시인은 그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셔주고 싶다. 지난날 보았던 맑은 눈빛이 내내 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파란 눈빛으로 티 없이 살아가길 기원하는 마음이었을까.

하늘의 우물은 깊고도 깊다. 퍼내면 퍼낼수록 더 맑게 흐르는 옛이야기 같은 것. 어쩌면 그리움이 많아져서 자꾸 깊어가는 게 아닐까. 어린 시절 고향과 고향 집, 또래들과 뛰놀던 언덕배기 가을빛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청명하다. 시인은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에 고향을 그려놓는다. 생각해보면 우물이 없어져 가는 지금 '우물'이라는 낱말은 우리에겐 점점 희미해져 가는 아쉬운 고향이다. 가을 시를 읽으면서 점점 잊혀가는 단어들을 더 잡고 싶은 건 이 시의 그리움 한 곳이 내게 든 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은 이렇듯 하늘에 써진 가을빛 낱말들을 다 그리움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립다는 건 때로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시인은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라 했다. 그가 타국에 유학하면서 먼 고향 하늘을 그리며 얼마나 절실히 살아내고 있었을까. 하늘에 어려있는 얼굴들이 그가 돌아갈 때까지 파란 가을처럼 화창하게 남아있어 주길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운 얼굴을 비추기 위해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파는 가을은 고향 떠나온 도시민들의 위로가 되어줬을 것이다. 잃어버린 서정을 데려다주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느새 우리도 파란 하늘이 되어 있다. 이 가을, 잘 물든 서정 한 잎 주워 오래된 그리움 한 편 들춰냈으면. 이미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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