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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학 새내기 때였다. 비록 40여 년 전 일이지만 어느 노교수님의 첫 강의시간에 들은 통렬한 일갈은 이제 막 서리가 내리는 내 귓가엔 여전히 쟁쟁 살아 있다. 무슨 대단한 금언을 기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순간은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스위스의 교육사상가이며, 조건 없는 사랑과 고매한 인격을 교육의 필요조건으로 내세우고 실천한 페스탈로치, 아니면 일제 강점기 심훈의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 우리민족의 냉혹한 식민 현실에 아낌없이 모두 던진 그 헌신적 삶과 생활철학 등을 본받아 소박하나마 저마다의 가슴에 품고 사도의 길을 가려 모인 신입생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님은 단호하게, 

"가르침은 없습니다! 오늘 사범대 학생이 된 여러분! 정말 미안하지만 이 세상에 '교학상장(敎學相長) 서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애초 없었습니다. 그것은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사이비 언변일 뿐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르치려드는 사람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가르침은 없고, 각자의 필요와 의지에 따른 배움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 한갓 말장난 같은 '교학상장'은 이 시간 이후 싹 잊으세요"

그 노교수님은 그날 이후 때때로 잊을 만하면, 가르치려 하지 마세요. 제발 가르치지 마세요. 대신 선 순환적으로 배우려고만 하세요. 익히려고만 하세요. 그렇게 학기 내내 가르치지 말라는 것만 일일이 찾아 가르치셨다. 

그때로부터 수십 년을 표류하는 배처럼 흔들리며 여러 교육현장을 기웃거리고 경험한 필자는 지금 생의 마지막 교육현장인 문해 교육 최 일선에서 뛰고 있다.

수많은 문해교육 학습자들과 직접 부딪히고 갈등하며 땀 흘려 소통하다 문득문득 깨닫곤 했다. 학창시절 그 노교수님의 '가르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내 온몸으로 새록새록 체득하고 있다. 칠십 혹은 팔십 평생을 학교 근처에도 못간 까막눈으로 살았어도, 그래서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지만 남이 그것도 몰랐냐며 가르치려 들면 열이면 열이 모두 발끈했다.

그런 그들이지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경우는 함께 해보자거나 같이 알아보자며 선생님이 청유의 태도를 보일 때다. 그럴 때 가장 이상적인 능동적 자발성 곧 자주적 학습조차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先生)'이란 말의 의미도 먼저 태어났다는 것이니 '가르침'이 아니라 '솔선수범'을 먼저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배워야 솔선수범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애초에 선생님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겠다. 이쯤에서 앞서의 교학상장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지 가르침을 준다는 부분은 재인식할 때가 되었다.

이와 같은 배움의 또 다른 모습이자 결과물이 앎이다. 인류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인 공자의 앎에 대한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논어 선진편에는 제자 계로가, "감히 죽음에 대해서 묻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감문사. 자왈, 미지생, 언지사(敢問死. 子曰, 未知生,焉知死)" 이들 사제간의 대화를 보면 즉문에 즉답을 회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답을 피하는 공자의 태도를 보면, 당장 할 수 있는 눈앞 현실의 삶을 먼저 열심히 챙기다보면 아직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즉 죽음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즉시 행하는 가르침으로는 불가능하거나 실체에 대한 접근은 어렵고, 모르는 것을 알려고 차근차근 시간과 공을 들여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다보면 보다 근원에 가까워진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자의 다른 문제 상황에서의 태도 역시 대부분 즉답을 피하고 있었다. 이는 명백히 '가르침'의 모습이 아니라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는 '배움'의 모습임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온통 코비드19의 폭력적 자장과 폭풍 속에 속수무책 휘둘리고 있다. 그동안 만물의 영장이라며 지독한 오만에 빠졌던 인류의 삶이 오늘처럼 비루하고 영락한 적이 없었다. 머리로만 알던 지식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난관에 우리는 지금 봉착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목표를 따뜻한 가슴과 냉정하게 판단하는 머리, 끊임없이 부지런한 손, 곧 윤리 도덕과 지식 그리고 기술, 이 셋의 원만한 조화로 완성되는 전인격적 인간을 기르는 것에 두었었다. 

그런데 편리와 효율에 매몰된 우리 인류는 어느 틈엔가 귀찮고 신경 많이 쓰이면서도 남는 게 없어 보이는 조화를 내팽개쳐버렸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용량을 겁도 없이 넘어서서, 배우고 배워서 익히는데도 시간이 부족한 깜냥의 존재이면서 매사에서 이무도 환영하지 않는 가르침을 가르치려고만 들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지금의 이 비인간 몰인격적 상황인 코비드 천국을 불러들인 것은 아닌지? 뼈를 깎는 성찰로 더 큰 배움이 있어야겠다.

집 앞 호계벌판의 황금색 벼가 바야흐로 세상 가장 아름다운 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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