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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거친 파도를 막아내는 콘크리트 제방이 길게 뻗어진 해안가 말레꼰과 식민시절 스페인군이 쌓은 모로성. ⓒ서영교
카리브해의 거친 파도를 막아내는 콘크리트 제방이 길게 뻗어진 해안가 말레꼰과 식민시절 스페인군이 쌓은 모로성. ⓒ서영교

토론토를 거쳐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해 택시에 탄 것은 예정보다 2시간 30분 늦어진 새벽 2시경이었다. 마음은 급한데 짐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결국 30분 정도 지난 뒤에야 하나씩 트렁크를 뱉어내기 시작한다. 기사에게 폰에 적힌 주소를 보여주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호텔도 아닌 까사(민박)에 연락도 없이 늦은데다가 주소라고는 달랑 세 단어가 전부였다. 울산으로 치면 울산 남구 신정동 정도 아닌가. 보여주는 나조차도 의심스러운 주소를 보고도 기사는 두말없이 출발한다. '이 놈, 제대로 도착할 생각이 있는 건가?' 하는 의심에 관자놀이가 팔딱팔딱 뛰는 듯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짙은 어둠이 깔려 있고 택시의 헤드라이트만이 그 어둠을 뚫고 달린다. 잉글라테라 호텔로 보이는 멋진 건물의 불빛이 후광처럼 나타나 영 엉뚱한 곳으로 온 것은 아니구나 싶었지만 이내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다. 한참을 더 가서 택시가 멈춘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못 들어가니 짐 가지고 따라오란다. 이 시간에도 거리에 나와 앉아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기사가 물어 집을 찾아주고는 떠난다.

쿠바 수도 아바나의 랜드마크인 카피톨리오(옛 국회 의사당). ⓒ서영교
쿠바 수도 아바나의 랜드마크인 카피톨리오(옛 국회 의사당). ⓒ서영교

# 류준열이 불붙인 여행길
 

쿠바의 국기
쿠바의 국기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시선들을 등으로 받아내면서 육중한 철문 너머로 들여다 본 건물 내부는 올드 보이의 사설감옥을 떠오르게 한다. "내 이름이요,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산다 해서 오대수요" 하던 최민식.

나의 오늘은 이렇게 잘 수습될 것인가? 낯선 곳에서 벌써 꼬리를 말아 넣은 강아지가 돼버렸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수줍은 영어를 쓰는 집주인의 미소를 보고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방에 짐을 두고 테라스로 나와 밤의 아바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쿠바행을 결정한 것은 불과 일주일 전. 방송에서 류준열이 트래블러 쿠바편에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 박보검에 이어 류준열까지…. 조만간 한국에 쿠바 바람이 불겠구나 하는 섣부른 생각에 바로 티켓을 예약했다. 그때까지 내게 쿠바는 체 게바라, 헤밍웨이, 카리브해와 말레꼰, 올드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등등 낭만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무엇이었다. 언젠가 꼭 가봐야지 하는 나라였는데 류준열이 방아쇠를 당겨 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쿠바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 인터넷이 여의치 않은 나라,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많은 나라다. 한국과는 공간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가까울 뿐 아니라, 미국보다 미국화 된 한국인에겐 삶 자체가 반대에 가까운 나라다. 배낭에는 여행 정보지 한 권. 나머지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치코와 리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체 게바라 자서전. 이것이 내가 쿠바를 위해 준비한 전부다.

동이 터오면서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에서는 할렘의 밤과 같던 도시에 낭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멀리 까삐똘리오가 보이고 앞으로는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고 세월의 더께가 씌워진 건물들이 성냥갑처럼 붙어 있다. 마치 과거의 영광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모습이 처연한데, 옥상에 널려 힘차게 나부끼는 빨래들이 나 아직 살아 있어 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 영어소통 어렵고 느린 인터넷
까사에서 불과 한 블럭을 돌면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한 듯하다. 쿠바의 화려했던 과거를 상징하는 잉글라테라 호텔이 코앞이다. 호텔 앞은 화려한 색채의 올드카들이 낭만을 팔기 위해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쭉 이어지는 길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오비스포 거리다.

올드 아바나는 198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여행객을 반기는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오비스포 거리. ⓒ서영교
올드 아바나는 198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여행객을 반기는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오비스포 거리. ⓒ서영교
1982년 도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올드 아바나 거리에서 만나는 낡고 허문 스페인 건축양식의 건물들. ⓒ서영교
1982년 도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올드 아바나 거리에서 만나는 낡고 허문 스페인 건축양식의 건물들. ⓒ서영교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 ⓒ서영교
 

환전을 하고 인터넷 카드를 사기 위해 오비스포 거리로 들어서는데 카페와 거리에서 연주되는 음악들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거리공연으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노래는 쿠바의 아리랑이랄 수 있는 <관타나메라>이다. 쉽고 중독성 있는 이 노래는 '관타나모의 아가씨여'로 시작해 얼핏 순박한 청년의 수줍은 고백처럼 들리지만, '죽기 전에 이 가슴에 맺힌 시를 노래하리라'  '내 시는 숲에서 피난처를 찾는, 상처 입은 사슴,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는 운명을 함께하고 싶어요' 와 같은 독립에의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호세 마르티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이다. 찬찬 하고 울리는 기타 선율 뒤에 이어 나오는 꼼빠이 세군도의 목소리는 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혈관으로 들어와 하루 종일 내 몸을 흐른다. 듣는 순간 중독된다.

만약 쿠바를 여행한다면 '울띠모'를 기억해야 한다. 쿠바는 줄 서는 인생이다. 만성적인 물자 부족을 겪고 있고 정부에서 생필품을 보급하다 보니 어딜 가든 줄을 서야 한다. 그것도 우리처럼 건물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밖에서 뜨거운 태양 아래서 줄을 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줄을 서는 요령이 생긴 것인데, 줄의 마지막 사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누구 뒤라는 것만 확인하고는 그늘로 피한다. 

환전을 하고 에떽사를 찾아가 와이파이 카드를 사기 위해 다시 줄을 선다. 한번에 3장까지 구매 가능하다는데 모른 척하고 10장 달라고 했더니 씩 웃으며 3장만 준다. 쿠바의 인터넷 환경은 상당히 열악해서 도시 내 몇 군데 안 되는 와이파이존을 찾아 이용해야 하고 1시간 사용가능한 카드를 사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와이파이 카드는 그 번호가 적힌 긁는 복권처럼 생긴 종이인데, 처음엔 무심결에 긁었더니 번호까지 지워져 버렸다. 이런 조잡한 카드라니…. 1시간이라 해도 속도가 터무니없이 느려 카톡 확인이나 숙소 예약처럼 필수적인 것 외엔 그냥 포기하게 된다. 오죽하면 인터넷 이용하려고 대학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랴.

환전과 인터넷 카드를 사고 나니 오늘 할 일은 다 한 듯한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제는 정신없는 오비스포 거리를 벗어나 아바나의 거리를 느리게, 책을 읽는 속도로, 한 장 한 장 사진을 이어붙이는 느낌으로 걸었다. 발걸음은 어느새 말레꼰에 이른다.

# 말레꼰을 걸으며 향수에 젖다
말레꼰은 그리움이다.
말레꼰은 아바나의 북쪽 해안을 따라 이어진 방파제 길이다. 미로와 같은 도시에서 쿠바가 섬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곳이고 쿠바를 대표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은 스치듯 지나가지만 쿠바노들에게는 낮에 흘린 땀을 식혀 주는 쉼터이자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하며, 아침에 출근해서 하루종일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들의 직장이기도 하다. 맞은편의 무너진 집터는 땀을 흘리는 복서의 체육관이 되기도 한다. 카리브해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복서라니.

파도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말레꼰을 걷다보면 주인 잃은 향수들이 떠돈다. 해변의 파도에 비해 방파제의 파도가 더 큰 향수를 일으키는 것은 해변의 파도처럼 그리움을 속으로 삼키지 못하고 그 마음을 들키기 때문이리라. 괜찮다 괜찮다 하다가 터져 나오는 울음처럼 파도는 방파제에 와 부딪힌다.

서영교 <br>class614@naver.com<br>1971년생, 현 CK치과병원 원장<br>울산대 평생교육원 사진창작반 수료<br>​​​​​​​단체 및 그룹전 7회
서영교
class614@naver.com
1971년생, 현 CK치과병원 원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사진창작반 수료
단체 및 그룹전 7회

과거의 일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도 지금의 내게 향수를 일으킨다. 여행지에서의 집착 때문이다. 다음에 오면 여기도 가보고 이것도 해보고… 마치 다시 올 것처럼 다음을 기약하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여행하는 대부분의 곳을 내 남은 생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는 것.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 내 인생에 꼭 한 번 있을 순간이 지금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첫눈 오는 날 다시 만나자는 약속처럼, 지켜지지 않을 것을 이미 아는 그 약속이 지금의 내게 향수를 일으킨다.

이후 아바나에서 보낸 2주 동안 마치 퇴근길, 그날의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기 위해 잠시 들르는 포장마차처럼, 아바나에서의 나의 하루는 말레꼰을 걷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걸으며 플로리다 해협 쪽으로 지는 노을을 본다. 이따금 방파제를 넘어오는 파도의 포말이 도로를 집어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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