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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이강하

아주 오래전부터 동행한 당신과 나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숨소리가 뚜렷이 국경을 넘네
절벽 너머 그 너머
아무나 신을 수 없는 태초 부족장 신발로

수천 광년을 말아 올리는 소리
수천 광년을 말아 내리는 소리에
더 단단해진 사원
못 다한 말과 행위가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기억으로부터 버림받은 통증
거부의 날은 뼈 속에서 흔들리고
절벽은 매일매일
누군가를 지켜준 수문장이었을 것이네

자근자근 밟히는 태양의 파편
섬의 신발은 문명이 두렵네
갯벌 속 침묵이 아늑히 느껴질 뿐

아주 오래 전부터 견뎌온 문장
아무나 들을 수 없는 부족장 언어가
빽빽하네

△이강하: 2010년 '시와 세계' 등단. 시집 '화몽' '붉은 첼로'.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 울산문인협회 회원. 변방 동인.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수천 광년을 말아 올리는 소리"라니, 게다가 수천 광년을 다시 말아 내리는 소리라니!
시인은 채석강에 서서 이 광활한 소리를 듣는다. 저물녘일까? 눈 밝고 귀 맑은, 시인에게만 들리는 이 까마득한 소리를 나에게 전한다. 나는 가을 한복판에 앉아 신비로운 소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을 감고 조금씩 천천히. 매무새 단정히 한 새벽, 아직 어둠이 깊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더 작은 소리 들린다, 보인다. 더 작은 소리 속 또 더 작은 소리. 아주 가느다란 한줄 끈 같은, 그대 멀리, 누굴까?

시 속에 이 두 행이 안내하는 세상은 참으로 깊고 넓다. 1광년이 대략 10조㎞라고 하니 수천 광년을 말아 올리고 다시 말아 내리는 저 절벽은 말 그대로 '무한한 공명'의 세상인 것이다. 시인은 이 두 행을 위해 얼마나 많은 말들을 버렸을까. 아니 삼켰을까. 절벽 너머 그 너머로. 나는 이 두 줄의 '소리'가 아주 오래된 현악기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두 행의 소리가 채석강과 동의어로 읽힌다.

'소리'에 당도하는 길은 아득히 멀지만 발소리는 뚜렷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동행한 당신과 나"가 국경을 넘는 숨소리도 그렇다. "아무나 신을 수 없는" 신발을 신었기에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발현하여, 오래 견뎌온 문장으로 침묵한다. 채석강 절벽이 더욱 단단해진 사원이 된 것은 그 침묵의 힘일 것이다. 그래서 그 절벽은 뼈 속 깊이에서 '기억'과 '통증'으로 흔들리며 "매일매일 누군가를 지켜주는 수문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채석강은 변산반도의 서쪽에 있는 수만 권의 책을 쌓아둔 모습의 해식절벽으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라고 한다. 시인이 들은 수천 광년을 말아 올리고 내리는 소리를 품었을 법하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변산반도에 다녀오고 싶다. 시인 이백이 달그림자를 즐겼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풍경이 견줄만하다고 하니.
그 아름다운 풍경도 풍경이지만, 수천 광년을 말아 올리는 소리가 궁금해서이고, 다시 수천 광년을 말아 내리고 있을 절벽이 아리게 그리워서이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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