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길
당신의 길
  • 윤경화
  • 2020.10.22 18:41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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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윤경화 수필가

추석 연휴가 예년보다 길다. 모처럼 휴일이 주는 여유로움에 따끈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걷고 싶었다. 얼마간의 경사도가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걷자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주변의 자연경관이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한참 걸으니 콧등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솟는다. 얼마만의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요즘 사회 분위기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식민국가처럼 느껴진다. 그가 대장인 것만 같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역시 사람이 대장이고, 곶감이다. 그 무섭다는 바이러스 속을 뚫고 추석 연휴를 맞아 모두 떠났다. '간봉지'가 작은 나만 산마을에 남아 있는 듯,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이 돈다. 내친김에 아직 걸어보지 못한 마을길을 따라 오전 내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이사 온 지가 십여 년이 되었는데 가보지 않은 길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무엇보다 길들이 자동차가 산속 깊숙이까지 거침없이 들어가도록 정비되어 있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걷고 있는 나를 위협이라도 하듯이 이따금 자동차가 휙 지나갈 때면 내 안에서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몇 시간째 돌아다니자 다리마저 후들거리며 '성질'이 까칠해지기 시작해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묘한 그 감정의 정체를 곱씹어 본다. 상실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길을 사람이 스스로 널찍하게 만들어 자동차에 헌납해버린 것이다. 급기야 쇠붙이 그 물건이 사람을 위협하듯 휙 지나가다니. 거기에다 식은땀이 나도록 놀란 것이 화가 나고 억울했던 것이다. 그리고 잘 닦여진 길을 좀 걸었는데 다리는 또 왜 이리도 후들거리는지. 내 발과 다리가 어느새 안녕하질 못하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인간에게 걷는 일이 선택 사항이 돼 버렸다. 신체의 2퍼센트를 차지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고 있는 발의 기능이 그 쇠붙이 때문에 스스로 퇴화되어 가는 듯하다. 기실은 변화의 욕구가 강하고 끊임없이 새롭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 때문이란 말에 공감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한마디로 길의 문화가 달라졌다. 도시가 많아지고 먼 거리는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걸을 수 있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많이 줄었다. 길의 기능 또한 여가와 물류 수단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을 배려한 길이 줄어들고 사라지니까 소통의 대상도 달라진다. 건물 안에 있거나 차 안에서 이동을 하기에 소통은 매우 제한적이고 건조하다. 주로 차가운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방백을 하듯 떠들어대거나 자판을 피아노 연주하듯 두드리다 조용해진다. 그게 주요 소통 방식이란다. 인간이 자초한 비애다. 

십여 년 전 산마을로 처음 들어왔을 때 주변의 길은 살아 있었다. 거처에서 문복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 지나가면 그곳이 곧 길이었다. 길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유 공간이기에 잠시 걸어도 다양한 소통을 경험할 수 있었다. 때로는 야생초가 진로를 방해하면서 통행세를 요구했다. 하지만 잠시 저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눈을 맞추고 함께 미소를 지으면 통과다. 방아깨비와 사마귀가 여기저기서 사랑을 하고, 바람이 쑤석거리면 큰금매화가 와르르 샛노랗게 웃었다. 오래된 사스레나무의 굽은 가지에는 다람쥐의 익숙한 길이 있었고 나무 아래는 고라니와 멧돼지가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나는 그 길에 익숙하지 않아 엉킨 풀줄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하절기의 해질 무렵엔 산책을 즐겼다. 걸으면서 버리고 싶은 것을 쏟아놓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고독과 침묵을 가득 담아오는 기쁨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편리한 길이 한 갈래 두 갈래 생겨나면서 고라니의 소리도 줄어들고 길섶의 야생초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가 하루에도 수차례씩 메아리치면서 내 발도 걸을 일이 줄어들었다. 그 후 잡다한 일에 빠져 마을길을 따라 걷던 일도 잊고 지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모처럼 가보지 않았던 마을길을 걸으면서 바뀐 환경에 갑자기 개안이라도 한 듯 놀랐고, 허약해진 하체에 또 놀랐다.

잠시 길과 발의 친밀했던 역사를 떠올려 본다. 학창시절 3~4킬로미터의 거리는 예사로 걸었다. 이웃에 잔심부름부터 소박한 여행까지 직립 보행하는 신인류가 누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누렸다. 어쩌다 상대하기 거북한 이웃 마을의 네 발 누렁이라도 만나면 나는 두 발로 날 듯이 논두렁 밭두렁을 달려 마을 어귀의 고샅길에 멀리 뛰기 선수가 착지하는 것처럼 멈췄다. 위기의 유쾌한 마무리다. 발의 공덕이 안겨준 귀한 추억 중 하나다.

순발력 넘치던 발과 다리의 능력은 현대 문명의 상징인 자동차의 등장으로 게으름뱅이에다 약골이 되어 믿을 수 없는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허약체질의 사람에게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조언이 '걷기'다. 영국 문호 찰스 디킨스 역시 걷기를 강조했다. 사람은 우주의 축소판이다. 오장육부를 건강하게 하는 행위는 바로 걷기를 통한 소통이다. 어느 곳이든 흐름이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찻길을 내느라 사람의 길이 사라진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다.

문명의 영향이 사람을 보조할 때 인간의 삶은 건강해진다. 자동차를 타고 훽훽거리며 정체불명의 문명을 쫓다 삶이 끝나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서 한기를 느낀 경자년 추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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