낀 세대
낀 세대
  • 최옥연
  • 2020.11.05 19:57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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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최옥연 수필가
부모가 떠나고 나면
지나온 흔적들을 더듬으며
'라떼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살아갈지도…

가을 나들이라 여기며 어머니를 보러 간다. 그런데도 발걸음이 가볍지 만은 않다. 어머니에게 가는 길은 대부분 혼자였다. 고독하게 남은 생을 살아내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은 늘 복잡하다. 연로함으로 몸을 마음처럼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이 가슴 한 쪽에 늘 부담으로 남는다.

우리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부모는 당연히 부양해야 하는 세대가 되었다. 슬프고 힘든 시대를 살아온 부모세대 곁에서 껌 딱지처럼 붙어 유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부모세대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이가 깊어가면서 철이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여긴다. 그런데도 뒤를 돌아보니 2, 30대를 살고 있는 나의 아이들이 있다. 문득 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낀 듯했다. 때론 그 낀이란 짧은 단어가 주는 옥죔이 적지 않다. 아님 유독 나만 심하게 느끼는 것일까.

오늘도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 곁으로 간다. 구순인 어머니는 당신 딸이 얼마나 바쁜지도 모르거니와 좁은 틀에서 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구구하게 말을 한 적이 없으니 그냥 아이들을 곁에 두고 일을 하며 매우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 크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 스스로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걱정 없이 살고 있는 사람 중에 나를 붙박이로 넣어두고 있는 것 같다. 때론 숨이 차다.

생각해보면 우린 참 슬픈 세대인 것 같다. 부모님의 세대를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느꼈기에 반복되는 그 긴 삶의 영웅담을 들을 때마다 위로를 해야 한다. 그로 끝남이 아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봉양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바라보면 그 험난한 세상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저 세대가 어떻게 걸어갈지 안쓰럽다.

어른들이 쓰는 우리는 그때 이랬다는 '라떼'라는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에게는 대물림하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그 마음을 우리 아이들이 가늠이나 할까싶다. 젊은 2030세대가 하는 지나친 말 줄임이 세대 구분을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안타깝다. 아무리 줄임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굳이 줄임이 필요 없는 말까지 일삼아 줄이고 있다. 때론 너무 지나칠 정도의 흥미 위주로 줄임말을 들으면 이해하려고 애써다가도 그 마음을 접고 만다. 밥 먹고 참 할 일이 없나 싶기도 하다.

이런! 입이 거품이 나도록 다음 세대이니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안 해도 될 말까지 나오니 나의 언행불일치를 어쩌면 좋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부모의 세대가 흔히 쓰는 '나 때는, 그때는'으로 시작하는 빗대어 쓰는 '라떼는 말이야'도 그렇다. 웬만하면 반복되는 말이라도 다 들어주리라 누누이 다짐한다. 그러나 여과되지 않는 어머니의 오래된 삶의 밑천까지 반복되면 굳건했던 다짐도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만다.

오늘 날에 아무리 복지가 잘 되고 의료 기술이 발달해도 노년의 삶은 슬프기 마련이다. 마음으로 이해한다고 말로 해도 삶 자체가 슬프고 힘들다. 늙으면 빨리 죽어야 된다는 입버릇 같은 말은 반은 진심일 것이고 반은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본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 뱉는 마음이 늙음 안에서 얼마만큼 서러운 일인지 가늠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생각의 옹졸함이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다 내 가 만든 것이 아닌가. 나는 자주 우리만 낀 세대라고 여긴 것 같다. 그런데 보릿고개를 겪었던 부모님도 낀 세대였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취업이며 주택 마련도 쉬운 길을 걸었다. 그에 비하면 취업난과 주택난에 허덕이며 결혼을 거부하며 욜로족을 자처하는 나의 자식 세대도 어쩌면 더 치열한 낀 세대인지 모른다. 내 다음 세대는 낀낀 세대를 논하는 것처럼 누구나 보이는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나의 작은 힘듦이 남의 큰 고통보다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부모를 섬김이 늘 부족했던 이유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부모가 힘든 시간들을 잘 견기며 살아냈듯이 우리도 IMF를 겪었던 세대다. 그래도 또 살아내고 있다. 낀 세대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한 번씩  부모와 아이들의 중간 세대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부모의 지나온 시간들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리라.

잠시 너스레를 떨었던 것이 결국은 어리광이 아니었다 싶다.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부모가 떠나고 나면 그 지나온 흔적들을 더듬으며 하지 않겠다던 '라떼는 말이야'를 나도 입에 달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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