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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국격 떨어뜨린 트럼프 집권 4년
리얼리티 쇼는 끝났다. 회끈한 CEO, 국가의 이익을 자신의 일처럼 챙기는 사람, 누가 뭐라해도 국익이라면 욕먹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저돌적 보스… 숱한 수식어가 함께했던 트럼프의 시대는 저물었다. 화려했지만 거칠었고 가슴을 찔렀지만 저질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미국을 부끄럽게 만든 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닌 그는 끝자리 역시 요란했다.

도날드 트럼프 이야기다. 그는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언론이 바이든의 승리를 확정하는 보도를 내보낸 직후 트럼프는 "월요일(9일)부터 적법한 승자가 취임할 수 있도록 법원에서 소송 추진을 시작할 것"이라며 사실상 불복 선언을 했다.

그의 발언이 있기 전부터 주요 접전 지역에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일부 주의 경우에는 주정부 청사 주변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무장한 채 모여들기 시작했고 개표소 곳곳에서는 여전히 살벌한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이다. 

트럼프를 향한 광적 지지는 우리나라 급으로 치면 태극기 부대를 연상시키지만 그 역사는 오래됐다. 가장 가까운 과거로 돌아가면 역시 히틀러의 광팬부대다. 20세기 초 세계를 광기로 몰아넣은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마자 독일 우월주의를 표방했다. 바로 그 점이 히틀러의 노림수였다. 히틀러가 흔들어 댄 깃발의 색깔은 독일 우월주의였지만 바탕에는 히틀러 자신이 있었다. 가장 잘 먹혀드는 핵심층은 때묻지 않은 청년층이었고 히틀러는 바로 그 집단을 겨냥했다.

교육의 목적은 단 하나, 청년층을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이었다. 이른바 '히틀러유겐트'라는 청소년 조직으로 시작된 히틀러의 독일 우월주의는 독일 청소년들의 영혼을 앗아갔다.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떨쳐 나가기 위해 유대인은 걸림돌이라는 사실이 전파됐고 전시기간 600만의 유대인은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멸종 위기 상황에 몰렸다. 

#유겐트, 홍위병 그리고 태극기 부대
비슷한 학습을 한 이가 중국의 모택동이다. 모택동은 중국의 청년들을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애완견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세뇌작업이다. 여전히 중국의 구세대들에게 모택동은 신으로 인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뇌화의 과정을 거쳐 모택동을 신으로 받들게 된 홍위병들은 모택동을 위해서라면 불길 속도 마다 않고 온 몸을 던졌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모택동이 키운 1,800만 명의 홍위대는 중원을 휩쓸고 변방으로 흩어져 3,000만 명의 적폐세력을 처단했다. 이들에게 찍힌 적폐는 자본가 자유사상가는 물론 민족주의자이거나 존경의 대상이 됐던 인물일지라도 모택동의 이름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적폐의 명패를 붙여 도륙했다.

광기의 시대였다. 바로 그 광기의 바람이 자유민주주의의 심장, 꿈의 대륙이라는 미합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의 4년이 만들어 놓은 괴물이다. 트럼프는 자극적이지만 진실이 없었다. 달콤했지만 추악했다. 반짝거렸지만 편을 갈랐고, 솔깃했지만 저질이었다. 그래서 바이든이 들고 나온 대통령 선거의 캐치프레이즈는 '나라의 영혼을 위한 전투'(Battle for the soul of the nation)였다. 

바이든은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서면서 민주당 전당대회 후보 수락연설 이후 줄곧 품격을 강조했다. 트럼프는 4년 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들고 나와 게임도 안될 것이라는 힐러리를 뒤엎고 역전승을 거뒀다. 이번에도 그는 4년 동안 유용하게 써먹은 '미국을 위대하게'의 속편인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Keep America Great)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선택은 바이든이었다. 바이든이 들고 나온 '나라의 영혼을 위한 전투'는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가 백인우월주의나 분열을 조장하는 리더십으로 전락했다는 점을 겨냥한 바이든식 품격이었다.

미국이 가진 다양성의 존중, 그리고 통합의 리더십, 기회의 평등 등 오늘의 미국을 만든 기존 가치를 지키자는 의지가 그대로 박혀 있는 문구였다. 미국이 품격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트럼프 이전부터 있어온 이야기지만 지식인 사회의 주류에서 미국을 향해 노골적인 비아냥이 터져 나온 것은 역시 트럼프 이후였다. 그만큼 트럼프는 미국을 분열시키고 국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권실세의 바탕에 깔린 반미정서
문제는 트럼프 이후의 우리에게 다가온 현실적 계산이다. 저질에다 품격이라곤 없는 리더였지만 북한 문제만큼은 외줄타기를 그런대로 잘 해온 트럼프 정부라는 평가가 문재인 정부의 기조다.

경제압박과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어가는데 걸림돌은 있지만 대화국면으로 북핵문제를 풀어가는 원칙이나 김정은을 적당히 대접하는 정도의 파트너십은 어느 정도 죽이 맞다는 생각이었는데 아뿔싸, 이제 원칙주의자 바이든이 파트너가 됐다. 이른바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집단의 주류사회 복귀다. 바로 이점은 지금 우리 정부의 주류들이 깔고 있는 반미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대미외교가 걱정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 주류 집단은 젊은 시절 반미 학습에 세뇌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깔린 반미주의의 현주소는 무엇일까. 구한말인 1880년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으로부터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받았다.

청나라 주일공사관에서 일하는 황준헌의 책이지만 실제로는 청의 실권자인 이홍장의 외교적 전략이 깔린 보고서였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친러시아 기류가 흐르던 조선정부에 대한 조언이었다. 황준원은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 조선의 미래를 보장하는 길이며 이 방편으로 친중 결일 연미를 통해 조선이 자강책을 도모해야 하다고 주문했다. 특히 러시아의 조선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은 미국과 즉각 수교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로부터 2년 후 고종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한반도에 미국의 세력이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선에 발을 들인 미국의 안중에 조선의 안위는 없었다. 시작부터 미국의 의도는 자국의 이익이었고 이를 위해 조선은 언제나 이용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한세기가 넘게 계속된 미국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실로 곡절이 굽이쳤다. 시작은 이홍장의 전략이었지만 한국전쟁과 함께 대한민국과 미국은 말 그대로 혈맹관계가 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필자의 세대는 미국에 대해 '환상'을 학습해 왔다. 그 당시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미국인들은 교양 있고 질서를 잘 지키며 대체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이 위급한 상황이 되면 자기 일도 잊고 도와주는 '천사'로 교육했다.

그런 미국이 문명국가이자 세계의 질서에 균형추 역할을 하는 면도 있지만 인종차별의 나라이자 폭력과 광기의 전쟁광이며 외교적 실리를 주판에 굴리며 한반도 관계에서 줄타기를 한다는 식의 학습을 하게 된 세대는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혼란의 결과물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바이든 이후, 한미동맹과 북핵 좌표설정
그 한쪽은 여전히 미국에 대한 환상을 현실화하는 쪽이기에 현대사에서 미국의 역할론에 주목하며 세계 경찰국가나 전통적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하겠다고 나서는 바이든식 국격회복에 박수를 보내는 쪽이다. 미국의 건재가 대한민국 국익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린 보수 쪽 이야기다.

하지만 부정의 인식에 기초한 쪽은 철저한 반미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최근 주미대사 이수혁의 발언이 대표적인 사례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미학습에 열정을 다한 인물들이 지금 대한민국 정계를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1980년대 반미시위의 주체였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 진보세력의 중심이다. 보수쪽에서 보면 미국사람은 '미국분'이지만 진보의 입장에서는 '미국놈'이자 한반도 분단의 주적일 뿐이었다.

갈라진 인식이 갈라진 사회로 드러나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 부대는 미국의 국기를 휘날린다. 하지만 한때 성조기를 불태우던 진보 세력은 김정은과 외줄타기를 하는 트럼프의 눈치를 보며 성조기 앞에서 휘발유를 뿌릴까 말까 머뭇거렸다. 바이든 시대의 시작은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한 방향설정을 요구하고 있다. 당장 미국의 새 정부는 북핵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가 더 선명해지기를 요구하고 나설지 모른다. 불편했지만 외줄타기로 지나온 시간을 지금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무엇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길인지 이제는 분명하게 드러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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