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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공영방송에서 경북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기획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제목은 '동해의 제국'이었다. 경북 개항 100년을 맞아 해양국가 관점에서 신라를 새롭게 조명하는 특집 다큐멘터리로 단서는 로만그라스.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와 로마 제국의 계승자이자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한 베네치아라는 두 도시를 연결하며 동해를 제패한 신라의 해상실크로드를 재구성했다.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와 경주에서 출토된 고대 유물들을 증거로 제시하며 천년왕국 신라의 해상무역을 재구성한 프로그램이었다.

# 울산 제외한 '동해의 제국'
로만그라스는 바로 신라 천년의 해상무역을 규명하는 증거물이다. 1만㎞ 이상 떨어진 서라벌과 베네치아가 어떻게 같은 유물을 공유했나를 의문부호로 던진 기획물은 해답을 바다에서 찾았다. 그리고 또다른 문제를 던졌다. 천년왕국 신라는 그 많은 황금과 철을 어떻게 조달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경주 주변을 뒤져 사금의 분포, 철광석 광산 등을 살펴 황금과 철의 왕국, 신라의 실체를 밝혔다.

제목만 봐도 가슴을 뛰게 하는 기획물이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동해바다는 1,000년 전의 상황보다 더 절실하고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은 한반도의 미래를 북방경제에 두고 그 에너지의 원천을 동해로 지목한다. 그런데 막상 다큐가 방영되자 방송을 보고 있던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1,000년 전 신라를 세계로 나아가게 한 바닷길에 울산이 사라졌다. 공영방송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6세기 이후 8세기 무렵까지 신라를 세계 4대 도시로 이끈 국제항로를 포항-울릉도-독도-오키제도-시마네현으로 이어지는 동해 항로로 지목했다.

문무왕이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 당나라 수군을 격파한 것을 황해의 제해권 장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신라가 동아시아 최고의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 시점부터 신라는 아랍으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를 완성해 세계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이야기였다. 해상 실크로드에 오른 아랍상인들은 서라벌에서 만난 황금 장신구와 세련된 공예품, 화려한 말안장과 신라보검에 매료됐고 강도가 높은 철장을 실어 날랐다.

아뿔사, 이렇게 역사는 또 왜곡돼 가는구나 싶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공영방송의 기획물을 따져보면 상당부분 고증이 잘된 매력적인 내용이다. 문제는 바탕이다. 동해의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경북 개항 100년에 주제를 맞추다 보니 1,00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억지스럽게 왜곡했다. 신라 1,000년 국제도시 서라벌의 무역항은 울산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지우고 시작한 기획물이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위안부 부정 등에 열을 올리고 흥분지수를 높이는 공영방송이 스스로의 역사에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물론 경북 개항 100년이라는 프로그램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 포항을 기점으로 동해 항로를 연결점으로 찾으려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감포는 신라시대 서라벌로 통하는 소규모 무역항이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바탕이 틀렸다. 울산의 반구동 항만과 개운포에서 이뤄진 수세기에 걸친 국제무역의 역사를 지우고 기획의도에 맞추려했다면 이는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 달천철장도 '경주 부근'으로 소개
기획물에서 딱 한번 울산을 언급한 부분은 달천철장이다. 이 부분은 왜곡할 수 없는 증좌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급했지만 그래도 울산이라는 부분은 빼고 경주 부근 달천철장이라는 애매한 명칭을 붙였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서와 연구자들 발표는 울산 달천철장이 신라 천년의 백그라운드였음을 웅변한다. 동사강목에 나와 있는 대목을 보자 '경주는 진한의 옛터인데… 이 나라에는 철이 나고 한·예·왜가 여기서 가져간다…'

신라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도학 교수는 "1892년 간행된 일본 최초의 한국사 개설서인 임태보(林泰輔·하야시 다이호)의 <조선사>에서 '철생산국을 진한'으로 지목했다"고 밝혔다. 문경현 전 경북대 교수는 1973년 발표한 논문'진한의 철산과 신라의 강성', <대구사학> 제78집에서 "달천철장(광산)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등장하는 '철생산국=진한'을 증명할 가장 유력한 후보지"라고 주장했다. 노천인 달천 광산에서 생산된 철의 함유량은 70%에 이르는 철광석이다.

또 달천에 인접한 동천강은 제철에 필요한 용수가 됐고, 동대산과 무룡산의 산림은 목탄연료의 공급처가 됐다. 이를 뒷받침하듯 지금까지의 고고학 조사를 보면 울산 지역에서 무려 20곳에 이르는 초기철기~삼국시대 야철 유적이 확인됐다. 황금의 나라 신라는 아랍의 시각이다. 실제로 3세기 이후 신라가 강성한 나라로 자리잡고 10세기 무렵까지 세계 4대 부국으로 열강의 반열에 들었던 배경은 철의 나라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증좌를 내일부터 울산박물관에서 기획 전시한다. 울산박물관이 기획한 전시는 '신라의 해문(海門), 울산 반구동'이라는 이름이다. 이번 전시는 울산 반구동 유적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울산이 신라의 해문 역할을 했던 지역임을 제대로 알리는데 목적이 있다. 해문은 나라와 나라 사이 해로를 이용한 교섭과 교류가 이루어질 때 마지막 기착지를 의미한다. 울산은 신라 왕경인 경주까지 거리가 멀지 않고, 평지로 연결돼 이용하기 편리했다. 또 울산만은 파도가 약하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신라의 외항이자 해상 실크로드의 기착지 역할을 했다.

# 신라 천년 '울산' 있었기에 가능
신라는 고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세계열강의 하나였다. 그 증거가 바로 울산의 내항과 외항, 즉 태화강 하류의 반구동 항만 유적과 개운포에 남아 있다. 8세기 무렵 세계 4대 도시는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 중국의 장안과 서라벌이었다. 당시 100만 인구가 거주한 서라벌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국제도시였다.

서라벌이 국제적인 도시가 된 배경에는 바로 울산이라는 거대한 국제무역항이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지금으로 치환하면 서라벌과 울산은 하나의 광역단위 거대도시였고 서라벌의 물류보급과 재화공급의 터전이 울산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이슬람의 지리학자 이드리시나 후드라드베는 서라벌을  풍요의 땅이자 유토피아라고 그렸다.

문제는 지금의 시각으로 신라를 바라보는 데 있다. 고려조 김부식의 역사서 삼국사기와 이를 텍스트로 한국사를 기술한 친일학자 이병도에 의존한 우리 역사는 많은 오류를 안고 있다. 그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라에 대한 기록이다.

일제는 조선을 침탈한 이후 악랄한 방법으로 조선의 정신을 살해하려 했다. 그 작업의 한 축이 과거사에 대한 정리였고 역사서의 '분서갱유'였다. 1910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일제히 수색했으며, 다음 해 1911년 말까지 1년 남짓 동안 무려 20만 권의 서적을 강탈해갔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당시 일제는 이 땅 곳곳에서 51종 20만 권 정도의 서적을 거둬 불태우거나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때 사라진 책 가운데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나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등 귀중한 역사서가 대부분이었다.

사라진 역사서를 들춰볼 순 없지만 이슬람의 기록이나 중국 역사서를 기초해 보면 8세기 무렵 신라는 우리의 상상보다 크고 웅장한 세계와 교류를 해온 국제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가 신라의 역사, 국제교류의 역사를 왜곡한다.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잡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울산박물관의 이번 기획이 더 반갑다. 모두가 찾아가 1,000년 전의 울산을 통해 미래의 울산을 내다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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