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겨울밤
  • 심수향
  • 2020.12.0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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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심하다. 연신 창문이 흔들리고 아귀 맞지 않은 문틈으로 비명을 울리는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창문을 여며 닫으려다 창을 열어젖혔다. 세찬 바람과 함께 어둠이 물컹 온몸에 느껴진다. 잊고 있었던 차갑고 따뜻하고 쓸쓸하고 그립던 겨울밤 시간들이 어둠 속에서 꽃피듯 피어오른다.
 
밤과 어둠을 떼어 생각할 수 없듯이 나의 겨울밤엔 몇 가지 요소를 빼버린다면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겨울밤이 될 것이다.
 
그 요소 중 하나는 어둠을 뚫고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다. 이들은 고요한 밤공기를 흔들며 마음 깊숙한 곳까지 아련히 스며든다. 특히 다듬이소리는 언제 들어도 반가워서 두고두고 저장해 놓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꺼내어 듣고 싶은 소리다.
 
내가 어린 시절 농촌에서는 추수가 끝나고 날이 뜨르르 추워지면 집집마다 이불호청과 베갯잇을 빨아 삶고 풀을 해서 시간 날 때마다 다듬이질을 하였다. 어머니들의 겨울나기 첫째가는 덕목 중 하나였다. 집집마다 다듬잇돌과 다듬이 방망이 정도는 가지고 있어서 요즘 다리미만큼이나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사실 다듬이는 생활용품이다. 하지만 소리만큼은 낮이건 밤이건 가까이서 듣건 먼 곳에서 듣건 모두 저 머나먼 미지에서 오는 듯 아련한 소리를 지녔다. 혼자서 두드리는 외 다듬이소리는 단아하고 처연한 느낌이 들고, 두 개로 두드리는 쌍 다듬이 소리는 이야기 같고 울음 같고 하소연 같이 들린다. 둘이 마주 앉아 네 개 방망이가 내는 소리는 아름다운 합창같이 때로는 얼굴을 숨긴 여자들의 아우성같이도 들린다. 빨라졌다 느려졌다 장단 맞추어 두드리는 소리는 신명이 실려 신날 때도 있고, 뭔지 모를 서러움에 얼굴 묻고 소리 없이 울고 싶을 만치 서정적이다.
 
다듬이 소리가 나는 시골 초겨울은 여유로운 농한기였다. 광엔 먹을거리가 쌓였고, 일 년 중 가장 살림이 넉넉해지는 때였다. 한해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즐겨도 좋은 그런 때였다. 일찍 해 저무는 겨울, 서둘러 저녁을 해 먹고 취미랄까 놀이랄까 어울리기 위해 삼삼오오 이웃으로 또는 다른 마을로 밤마실을 나섰다.
 
작은방이나 사랑방 아랫목에는 종일 두툼한 이불을 깔아두었고, 쩔쩔 끓도록 불을 때서 이불 밑에 발을 넣고 뜨개질을 하거나 수를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낙들이고, 아이들은 스무고개를 풀거나 나이든 삼촌이나 아재를 졸라 옛이야기 듣기도 했다. 초당에는 바깥어른들이 모여 새끼를 꼬거나 장기를 두다 술추렴도 하고, 가끔은 닭 잡아먹는 내기도 하여 작은 잔치가 되기도 했다. 두런두런 밤마실에서 돌아오는 캄캄한 길, 손전등을 흔들흔들 비추며 장난치며 걷는 것도 재미있고, 남의 집을 지나칠 때는 발소리를 죽여도 귀 밝은 개가 공공 짖는 것도 키득거릴 정도로 즐거웠다.
 
나의 밤마실에는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 '한밤의 음악편지'가 빠질 수는 없다. 느지막하게 친구가 찾아오면 저녁을 함께 먹고 이야기하다 한밤의 음악편지까지 듣고 나면 자정이 되었다. 그때서야 친구를 데려다 주러 나갔다가 헤어지질 못하고 다시 데려다 주고 또 다시 데려다 주다 중간에서 헤어져 돌아온 적도 몇 번 있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았던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객지에 나가 살다 방학 때 모처럼 만나는 친구여서 그리 애틋했나보다. 
 
방학을 제외한 겨울을 나는 서울에서 보냈다. 서울도 정붙일 곳이 없지 않았지만, 객지의 겨울은 쓸쓸하고 더 춥고 많이 외로웠다. 뒤척이다 겨우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소리 없이 소복소복 쌓인 눈으로 깜짝 놀란 일도 많았다. 가끔은 잠결에 누가 불을 켠 듯 환해서 눈을 뜨면 새하얀 천지에 얼어붙은 듯 내리는 달빛…. 그것은 지금 떠올려도 환상이지만, 그때 눈 없는 남쪽에서 살다온 내겐 신비였고 환상이었고 난감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십 번의 겨울밤을 보내고 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이만큼 세월이 흘러 있다.
 
깊어가는 오늘밤에도 어디선가 '찹쌀떡 사려, 메밀묵 사려' 소리가 들릴 것 같다. 그때 왜 그리 그 소리가 애절하게 들렸는지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알 듯 알 듯 모르고 살아온 그 길이 지금은 돌아보며 그리워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쉽고 후회스런 그 많은 시간을 되돌려 헤아려보면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고향엘 오늘밤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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