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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나무 구유

김감우

오백 년 전에 태어나
쌀 씻어 공양하는 그릇으로 살았다
석남사 대웅전 뒤 열반에 든
엄나무 구유 팔상도 아래 누웠다
저녁 강의 배를 닮았다
미루나무가 따박따박 제 박자를
지켜가던 유년의 저물녘
강 저편은 언제나 맘먹으면
풀쩍 뛰어 닿을 수 있을 듯 했다
풍경 속에 시퍼런 소용돌이 있어
뱃사공 장딴지에 푸른 정맥이
툭툭 돋아났다 강 건너 저녁처럼
팔상도 아래 날 다시 저무는데
구유는 빈 몸에 낡은 나이테만
차분히 싣고 항해 중이다
바닥에 물을 빼던 구멍
제자리에 있으니 편안하게
두렵지 않다는 듯 당당하게.

△김감우: 부산대학교 국어국문과졸업. 2016년 <열린시학> 시 등단. 울산문학 올해의 작품상, 두레문학상 수상. 울산문인협회 회원. 봄시 동인. 시집 <바람을 만지며 놀다>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시인의 눈은 가끔은 산이 강이 되고 강은 하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산이나 강이 하늘이 서로 연결고리가 탄탄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속을 수밖에 없다. 팔상도와 어울리지 않을 구유를 끌어 들여 석남사라는 가장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여 안심 시킨 후 다음 행을 궁금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의 의도가 빛나 보인다. 시인은 팔상도 몇 번째의 그림에 머물러 그 밑에 얌전히 있는 엄나무 구유에서 유년의 시간을 업고 온 것일까? 또 상관관계를 만들어 다른 그림을 그릴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아주 오래 전 목조용기로 쓰였던 구유, 제 역할 무사히 마친 후 낡은 목리에 얹힌 닿은 세월을 싣고 '저녁 강 배'로 열반에 들었다한다. 시인의 눈은 이미 구유에서 떠나 어스름한 풍경아래 떠 있는 배로 옮겨 와 있다. 그 풍경 속에는 어릴 적 보았던 익숙한 작은 만만한 강이 있다. 그러나 '풍경 속에 시퍼런 소용돌이 있어. 라고 한 시인의 시야는 더 넓고 깊은 생의 한 가운데에 머물기도 한다. 그러면 그 다음 시인의 눈이 무얼 보게 될까 궁금해진다.


팔상도의 8번 째 그림은 부처가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雙林涅槃相)이다. 시인은 이 마지막 그림과 연결하여 '나이테만 차분히 싣고 향해 중이다'라며 담담하게 펼친 그림을 접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용조용 드리우는 어둠 안으로 유유히 가는 빈 배를 보여준다. 우리의 마지막 생의 끝 장면처럼. 도순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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