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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시인이 앉아 시를 쓰는 밥상 위의 잔

바다로 가득 차 있는 둥근 물 잔

스스로 돌면서 노는 푸른 잔

떠났다가 마감 시간에 다시 돌아오는 잔

밤이면 웅크린 등 위로 별이 떠 반짝이는 잔

시인이 목이 마를 때 단숨에 마셔버리는

궁극의 잔, 그 잔 속 내가 있고

내 잔 속에 그 잔 놓여 있어

시인이 잠들지 못할 때 갈증 가득 차 있는 잔

비우고 나면 시가 그득하게 담겨 있는 빈 잔.

△정일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방' '소금성자' '저녁의 고래' 등.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재 경남대학교 석좌교수.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잔은 사유의 매개체다. 이른 아침 정안수를 떠 놓은 기도가 그랬고 성전으로 올리는 찻잔이 그렇다. 물이 담긴 잔이나 그 물을 마시고 난 뒤에 있는 빈 잔이나 모두 마음의 먼 곳까지를, 영혼의 깊은 곳까지를 담았다가 비우는 사유의 공간이 된다. 이때의 잔은 단순히 물이나 차를 담는 그릇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고요히 머무는 기다림의 공간이고 깊은 심연으로 길을 떠나는 고행의 출발점이며 먼 우주를 돌고 돌아 다시 돌아와야 할 귀향점이다.

이 시는 시인이 앉아 시를 쓰는 밥상 위의 잔이라는 소박하고 고요한 영상으로 시작된다. 오래 익숙해진 일상을 보는 듯 잔과 밥상과 앉아서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이 잘 어우러진다. 그 잔은 바다로 가득 찬 둥근 물 잔이 되면서 잔속에 푸른 우주를 가득 담는다. 그래서 잔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어 스스로 돌면서 자유롭게 놀고 있다. 여기서의 잔은 시인의 풀어 놓은 시어(혹은 시)와 같은 말이고 시인 자신과도 다르지 않다. 길 떠난 잔은 마감시간이면 다시 돌아오고 이때 비로소 시인의 웅크린 등 위로 별이 반짝이는 밤이 온다.

시인이 목이 마를 때는 단숨에 마셔버리는 잔, 그래서 그 잔은 궁극의 잔인 것이다.

이 시는 정일근 시인이 열세 번째로 펴낸 한영대역본 시집 '저녁의 고래'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시력 35년차인 시인이 시를 쓰는 일상을 잔 하나로 담아낸 시다. 이 시는 목마를 때 시인이 마셔버리는 '궁극의 잔'이라는 정점을 지나면서 시인과 잔은 서로 한몸이 된다.
그리고 다시 '비우고 나면 시가 그득하게 들어 있는 빈 잔'이라는 행으로 시를 마무리 하며 '잔'을 끊임없이 순환하는 미래의 공간으로 열어두고 있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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