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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숙 수필가
강이숙 수필가

이런저런 연유로 해서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30년 정든 집을 떠나 새 거처로 옮기는 일은 무척 성가셨다. 이사한 동네는 모든 게 낯설었다. 이삿짐은 몇 날 며칠을 정리해도 끝이 없었다. 

경황없는 동안 아파트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저녁 퇴근길에 입구를 잘못 들어 한참을 헤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마침 폭우까지 쏟아져서 더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을 불러내어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어이없다는 남편의 실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나님이 타고난 길치라는 걸 여태껏 몰랐단 말인가. 

부산함을 잠재운 후, 늦은 저녁을 챙기러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 창 너머로 번쩍이는 형형색색의 불빛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흡사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꾸며 놓은 듯 아름다웠다. 불빛에 비친 간판은 '기찻길 옆에서'라는 카페였다. 

이름이 낭만적이라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 앞으로 경전철이 지나간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언덕배기 카페는 4층인 우리 집과 눈높이가 아주 딱 맞았다.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고 목을 내밀어 위아래 좌우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대로 건너 기차가 지나가는 기슭에 자리한 카페는 동화 속에 나오는 언덕 위의 작은 집 같았다. 유토피아와 아련한 추억을 함께 불러왔다. 

저녁만 되면 불빛을 바라보는 게 일과가 되었다. 비 오는 날은 더욱 좋았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아늑한 목로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상상 속에도 빠졌다. 여우가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며 밤을 새우는 꿈도 꾸었다. 

주말 저녁을 이용해서 카페를 방문했다. 앳돼 보이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K-팝과 벽면을 가득 메운 명화, 럭셔리한 테이블과 의자 등 신세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갈한 손길을 받은 화초들이 싱그러웠다. 데크에는 실내용 그네와 흔들의자를 마련해 놓아 고객들의 휴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행여나 찬바람을 피하는 고객을 위해 무릎 담요까지 갖춰 놓은 세심한 배려가 따뜻하게 여겨졌다. 마주해서 바라본 우리 집 405호가 정겹게 다가왔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새 동네에 적응해 갔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곧장 주방으로 가서 불빛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정취를 만끽하고 난 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상을 이어가고 있던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부엌으로 갔는데 앞이 깜깜했다. 언덕배기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으려니 하면서 며칠을 참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불은 켜지지 않았다. 몹시 궁금증이 인 나는 열일 젖혀 놓고 길 건너로 달려갔다. 

맙소사. 굳게 닫힌 출입문에 '코로나 인하여 당분간 휴업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떡하니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놈의 위력이 이 외곽 동네 구석까지도 미쳤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에 휑한 바람이 몰아쳤다. 내 마음의 불도 함께 꺼졌다.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가 속한 문학단체 카페 '명수필 감상' 코너에는 반숙자 선생님의 <빙등>이라는 작품이 게재돼 있다. 즐겨 읽는 작품 중의 하나인데 수시로 그걸 읽으며 마음의 안식을 얻곤 한다.

'음성에서 충주로 가는 3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에 집 한 채가 있다'로 시작하는 이 수필은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건 희망이고 그것은 곧 생명의 불을 밝히는 등이라는 것을 빙등을 소재로 삼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언덕 위의 집을 솔베이지의 집으로 설정을 하고 사람은 기다림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사유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희망의 불빛이라는 걸 은연중 독자에게 각인시켜 준다. 

작가는 스위스 융프라우 여행 때의 빙등을 소환해 와 오색 빛의 향연을 내뿜던 환상에 심취했던 심연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리고는 바로 페르귄트를 향한 솔베이지의 기다림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곧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견디는 힘과 위안이 되는 것이라고. 어쩌면 밖의 어둠을 사르는 등이 아니라 안의 어둠을 밝히는 등이라고 조심스레 일러준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후세에 길이 남아 뭇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기도 하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가슴 뭉클한 그리움에 젖어 본다.

그렇다. 이 코로나의 계절은 곧 물러갈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나도 솔베이지처럼 살아갈 것이다. 

기찻길 옆에서, 곧 켜질 희망의 불빛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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