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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순 수필가
배정순 수필가

엄청 무더운 날씨다. 누가 말을 걸지 않아도 짜증이 날 만한 날씨다. 부축을 받아야 운신하시는 어머님은 오늘도 소파에 누워 가만 계시질 않는다. 몇 분 간격으로 에어컨 켜라. 꺼라 선풍기 켜라 꺼라 하시며 "얘야"를 불러 젖힌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화장실 불은 왜 끄지 않니, 사람도 없는 방에 왜 선풍기가 돌아간다니, 젊은 사람이 왜 저럴꼬 끌끌." 그놈의 왜, 왜, 왜…. 노모의 지청구는 결국 나의 건망증으로 귀결된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속에선 '좀 켜 놓으면 어때서'라는 볼멘소리를 내지른다. 저 연세에 기억력은 어찌 저리 총총하신지. 

어머님 탓할 일이 아니다. 금방 들은 것도 깜빡깜빡하는 나의 건망증이 문제다. 집에서는 식구들이 받쳐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장 보러 나가면 물건을 골라 값만 치르고 그냥 나오는 바람에 낭패다. 몇 걸음 가다 보면 "물건 가져 가이소!" 하는 주인장의 일갈이 뒷덜미를 잡아챈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물건을 골라 담고 돈 내는 걸 깜빡할 때도 있다. 자칫 의심받을 상황이다. 가게 주인은 나를 불러 세워 "아줌마 돈?" 하며 손을 내민다. 덧붙이는 말인즉슨, 요즘 내 또래 손님들이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며 나의 민망함을 희석하려 넉넉한 말 인심을 베푼다. "그렇죠?" 하고 웃으며 돌아서지만, 마음까지 그렇지는 않다. 

건망증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신혼 초였다. 그때는 왜 그랬던지 생활비 넣어두는 비밀 금고가 폐신문 모아놓은 갈피 속이었다. 흔적 없이 아무도 몰래 꼭꼭 숨겨두고 썼다. 한데 분리수거하면서 깜빡 잊고 신문을 몽땅 버린 것이다. 장 보러 가기 위해 돈을 꺼내려다 깜짝 놀랐다. 신문이 어디 갔지? 아뿔싸, 이를 어쩐다. 밖을 내다보니 수거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통로 사람들을 불러 폐지 집하장으로 달렸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지 그 많은 폐지 속 어디에서 돈 봉투를 찾을까. 하늘이 노랬다. 

나의 애타는 마음을 신이 돌보신 것일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 봉투를 찾아내 "심봤다"를 외쳤다. 마음이 날아갈 듯 환희로 바뀐 것도 잠시, 땀으로 범벅된 지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이보다 더 큰 민폐가 어디 있을까. 모난 돌에 정 맞는다고 그들은 그날 부실한 이웃을 곁에 둔 탓에 콩죽 같은 진땀을 통박으로 흘렸다.  

나의 건망증 역사가 짧지 않다. 언제이던가 서울 본가에 급한 서류를 가져가야 할 일이 생겼다. 터미널에 도착해 승차권을 사려다 깜짝 놀랐다.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린 것이다. 왕복 두어 시간 거리를 어린 아들을 둘러업고 택시로 달렸다. 종점 사무실 귀퉁이에서 낯익은 가방을 보는 순간 얼마나 기뻤던지…, 고맙다는 인사도 채 못하고 허겁지겁 터미널로 돌아와 본가에 올라왔다. 남편은 남편대로,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나를 향해 퍼붓는 지청구가 하늘을 찔렀지만 유구무언이었다. 

그 후 남편으로부터 내 자유는 박탈당했다. 건망증을 고쳐보겠다고 애쓰는 남편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물건을 썼으면 제자리에, 달력에 일정을 적는 습관 들여라, 가스 불 켜면 그 자리를 떠나지 마라." 밀착 닦달을 하는데도 여전히 메모하지 않고, 물건을 잃고, 냄비를 태운다. 남편은 자기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마음이 버선 짝이라면 뒤집어 보일 수나 있지 태생 입력장치가 허술한 걸 어쩌라고, 답답하다. 이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체질이다. 건망증을 학설에도 없는 '체질' 논을 들어 강변해 보지만, 깐깐한 그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외출할 때 여전히 뭘 잊고 나가 되돌아오는 나에게 남편은 "주인 잘못 만나 애먼 팔다리가 고생한다, 그래도 집은 안 잊고 찾아오는 걸 보면 용하다"는 둥 칭찬인지 비난인지 헷갈리는 말을 한다. 칼 같던 신경 줄에 농이 끼어든 걸 보면 마누라 길들이기에서 손을 든 것일까.

치매 검사를 받으러 갔다. 여러 검사 과정을 치르려니 마음이 착잡했다. 다행히 치매 단계는 아니어서 마음을 놓았지만, 인지 기능이 낮고 건망증이 심한 경우 치매로 갈 확률이 높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바짝 긴장된다. 요즘은 뇌 기능에 좋다는 음식 챙겨 먹고 운동에 시간을 할애한다.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치매 생각을 하면 불끈 일어나 공원 걷기를 한다. 운동으로, 음식으로 뇌 기능에 좋은 것을 다 챙기다 보니 그 덕에 각종 성인병도 꼼짝 못 할 것 같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  아닌가. 결코 벌벌 떨 일은 아니다.

요즘 친구들과 모이면 건망증으로 불거진 해프닝을 터뜨리며 웃는다. 제삿날을 잘못짚어 한 달 미리 음식을 준비했다는 이, 환승을 잘못해 삼천포로 빠졌다는 웃지 못할 사례도 등장한다. 그럴 때 '너도? 나도' 하며 위로받는다. 늙으면 늙은이답게 잊기도 하고 더러 허점을 보이는 게 귀엽지 않을까. 늙으면 아 된다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시시콜콜 안다고 나서는 노인 글쎄, 아무래도 밥맛일 것 같다.  

이쯤 되면 나의 건망증은 망령이 아닌 노년의 로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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