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도시 개발에 갇혀버린 신라천년 역사의 보고
[+영상] 도시 개발에 갇혀버린 신라천년 역사의 보고
  • 전우수 기자
  • 2021.02.0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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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울산] 8.처용설화의 발상지 개운포(開雲浦)
해안가에 길게 늘어선 울산항 인입철도와 공단 굴뚝, 송유관 등 산업시설에 둘러싸인 개운포구에는 신라천년 역사를 간직한 처용암이 외로이 바다를 지키고 있다.  김동균기자 jusgo999@
해안가에 길게 늘어선 울산항 인입철도와 공단 굴뚝, 송유관 등 산업시설에 둘러싸인 개운포구에는 신라천년 역사를 간직한 처용암이 외로이 바다를 지키고 있다. 김동균기자 jusgo999@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포구에 와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 용왕의 조화이므로 마땅히 용왕을 위해 좋은 일을 해 그 마음을 풀어 주셔야 한다" 했다. 왕은 곧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왕의 명이 떨어지자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개었으므로 이를 개운포라고 이름 지었다'고 적었다. 삼국유사에는 또 '왕이 용을 위한 절을 세우도록 해서 지어진 절이 망해사이고, 동해 용왕은 바다에서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나타나 춤을 추고, 이 중 처용이 왕을 따라 가서 급간이라는 벼슬을 얻어 정사를 도왔다. 이 때 처용이 나온 바위를 처용암이라 부르게 됐다'고 적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랑 망해사조는 이 같은 내용을 목판본 두 바닥 분량으로 담았다. 한글 번역으로 200자 원고지 열매 안팎에 불과하지만 처용랑 망해사조에 등장하는 처용에 관한 연구 논문은 수백편이 넘는다. 처용이 갖는 문학적 가치와 상징성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는 의미다. 처용암이 떠있는 개운포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보고다.

울산시 기념물 4호로 지정된 처용암
처용공원으로 관리 불구 초라한 풍경
신항 인입철도 개통에 굉음으로 가득

# 주민 떠난후 외로이 마을 지키는 처용암
찬바람이 매섭던 최근, 한삼건 교수와 함께 처용암을 찾았다.
 처용암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상징물은 처용암이 바라다 보이는 처용암 입구에 세워진 '처용가비'다. 이 비는 1985년 울산문화원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웠다. 

 해마다 처용문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가 이곳에서 열리면서 처용암 일원의 상징물처럼 됐다. 한 때는 처용암 설화를 근간으로 헌강왕 가장 행렬도 처용암 일원에서 근사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처용문화제에 대한 세간의 곱지 않은 시각과 함께 논란거리가 되면서 처용문화제 행사는 축소되고 처용은 그저 문학이나 연구 논문 소재에 그치기 시작하고, 이제는 사람들 관심의 대상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은 분위기다.

 세인들의 관심이 예전같지 않은 때문이라지만 처용설화의 배경이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처용암 일대의 풍경은 군색하고 초라하다.

 이 곳 일대를 울산시와 남구청은 처용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관리 상태는 행여 관광객이라도 들이 닥칠까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다. 누구로부터,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폐가전제품과 폐목 등 온갖 쓰레기들이 산처럼 쌓였고, 해안가 석축은 파도와 강풍을 이기지 못해 주저앉았지만 제대로 보수조차 되지 않은 채로 있다. 뭍 위에 올라앉은 녹슬고 고장 난 선박에다가 여기 저기 버려진 어구들이 어지럽다. 

 바람에 퇴색된 처용가비와 이곳저곳 부서져 흉물처럼 돼 있는 처용 캐릭터가 있어 이곳이 처용설화의 배경임을 말해 줄 뿐이다. 처용공원 관리주체가 공원과, 위생과, 문화재계 등 제각각 이어서 누구하나 책임감 있게 공원을 담당하는 주체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터 앞 바다에서 150m 떨어진 처용암은  동해 바닷길과 이어지는 외황강 입구를 지키고 있는듯 하다.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터 앞 바다에서 150m 떨어진 처용암은 동해 바닷길과 이어지는 외황강 입구를 지키고 있는듯 하다.

# 온갖 쓰레기·폐가전으로 엉망
처용공원 머리 위편으로는 울산신항 인입철도가 조성돼 지난해 개통됐다.
 항만 물동량을 주요 간선철도로 수송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철도가 들어서면서 공단은 활기가 띠게 됐지만 처용암 일원은 화물열차들이 오가는 굉음으로 소란스럽기만 하다.

 처용암 건너편 처용리에는 신일반산업단지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공장 건물들이 어지럽게 자리를 잡았고, 한 때 육안으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섬 동백섬 목도는 바다 위를 점령한 송유관으로 가로막혀 위치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행여나 이 초라한 몰골의 처용암을 찾은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느끼고 돌아갈까.
 한삼건 교수는 "마을이 없어지고 공단으로 남겨지다 보니 버려진 땅 사람들의 관심 밖의 땅이 되고 있다. 기념비도 있고, 정자도 있고 화장실도 만드는 등 정비도 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잊혀져가는 장소가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후약방문격이겠지만 산업단지를 개발하고 도시계획을 할 때 유적들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했다면 이러한 결과는 빚어지지 않았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수려한 풍경을 자랑했던 외황강 하구 그 수면 위에 그림처럼 놓여 있던 처용암은 마치 공단 한 복판에 포로처럼 갇혔다.

 처용공원 일원은 공단 조성으로 인해 다운동과 태화동으로 집단 이주를 해야 했던 세죽마을 사람들이 터를 일구고 살던 곳이다. 

 이를 입증하듯 처용공원 정자 옆으로 '세죽옛터비'라는 이름의 기념비가 최근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세죽에서 목도까지 5톤급 배 두 척이 오고갔고, 세죽에서 처용리까지 1톤급 나룻배가 오고갔다. 봄날 상춘객이 3,000여 명 이상 하루 관광버스 50여대까지 왔던 곳이다. 70년대 외황강 상류에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공해로 말미암아 주민이 살수 없는 공해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됐다'고 적혔다.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던 세죽마을 사람 중 일부가 뜻을 모아 지난해 초여름 마을내력을 담아 기념비로 세웠다고 한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처용암을 바라보고 있자니 처용암 인근 작은 배 위에서 미역다발을 손질하는 어부가 시선을 끈다. 

 "외황강 물이 맑아져 어류며 수산물이 옛날처럼 풍성해졌다"며 말문을 여는 이 분은 고향사람들 모두 떠났지만 젊어서부터 해오던 뱃일을 놓지 못하고 처용암 앞 바다를 지키는 세죽마을 사람 박윤석이라는 분이다. 인적 끊긴 처용암 일원에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반갑다는 듯 우리를 반겼고, 우리 일행은 이 분의 도움을 받아 처용암에 오르는 행운을 얻었다.

처용암에 오른 한삼건 울산대학교 명예교수와 전우수 기자.
처용암에 오른 한삼건 울산대학교 명예교수와 전우수 기자.

# 직접 바위섬에 올라 느껴보는 전율
사람들에게 쉽게 발길을 내 주지 않는 바위섬에 오른다는 설렘 탓인지 발 닿는 곳마다 신비롭다. 먼 발취에서 상상만 하던 바위섬. 실제로 처용암은 바위와 바위들이 모인 바위섬이었다. 

 파도에 흙들이 씻겨나가 바위 밖에 없는 그 곳에 3m 높이의 넓은 바위가 우뚝 섰고 그 앞으로 2~3m 넓이의 공간에 검은 상석이 놓였다. 이곳이 처용제의가 열릴 때 제를 지내는 장소다. 처용문화제가 호응 속에 개최됐을 땐 이곳 어디선가 처용들이 오방무를 펼쳐 보여줬을 것이다. 처용암에서 멀리 문수산 자락이 직선으로 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망해사가 저 어딘가에 세워졌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한 페이지가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다.

 둥글넓적한 바위틈 사이로 맥문동과 팽나무 쮜똥나무들이 자생하면서 바닷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한 교수는 "생각 보다는 공간이 넓다.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외국 사신이 왔을 때나 외국으로 떠날 때 이곳에서 기풍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다의 신, 바람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그만큼 성스럽게 여겼던 장소가 처용암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면서 "설화속의 현장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처용암과 세죽마을을 오가는 바닷길 관광투어도 좋은 관광상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남구 성암동 개운포성터에 성곽이 일부 정비된 남문 주변의 모습.
남구 성암동 개운포성터에 성곽이 일부 정비된 남문 주변의 모습.

조선 전기 최고 성곽유적 개운포성지
주변문화재 연계 관광화 제자리걸음
역사·문화적 가치 복원 노력 아쉬워


# 이주민 시설물 조성 역사관광자원 활용 조언
처용암 인근에는 또 다른 지정기념물이 있다. 1997년 지정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개운포성지다. 신라시대부터 왜구방어의 요충지로 이용되다가 조선전기에는 경장좌수군절도의 진영으로 사용된 곳이다. 

 조선전기 수영성의 구조와 형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최고의 성곽유적이라고 한다. 
 1459년(세조 5) 동래 부산포의 수영이 개운포로 옮겨와서 1592년(선조 25)까지 개운포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었던 곳으로 개운포가 전략적 군사 거점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수영이 옮겨간 이후, 1656년(효종 7)부터는 전쟁에 쓰이는 선박을 만드는 곳으로 일명 '선소(船所)'라고 부르는 전선창이 옮겨오기도 했다. 그런 때문에 성안의 마을이 철거되기 이전까지 이곳의 마을 이름은 '선수마을'이었다. 선소는 1895년 수군이 해산할 때까지 존재했다.

 개운포성지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차에 걸쳐 개운포성 일부 성곽에 대해 정비 및 잔디식재 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남구는 개운포성지와 인접한 성암동패총, 마채염전 등 주변문화재와 연계해 다양한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전혀 진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개운포 성지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승격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개운포성지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드높임과 동시에 예산이 없어 지지부진한 개운포성지의 복원에 탄력을 꾀해보자는 목적이지만 지금의 개운포 성지 상태로 과연 사적 승격이라는 카드를 들이밀 형편이 될지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한 교수는 "지금의 개운포성지 역시 처용암과 마찬가지로 공단과 도로, 철탑 속에 갇혀있어 관광자원으로의 활용가치가 떨어진다. 성곽내부는 사유지라는 이유로 제대로 전혀 발굴이나 개발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공단 개발 과정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돼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지금의 상황에 걸맞게 옛 개운포 성지로의 가치와 함께 이주민들이 이주애환, 공단개발사 등을 함께 담아내고 아우르는 전시관 등 이주민들과 연관된 시설물을 조성한다면 매력 있고 특색 있는 역사관광자원으로 확장 발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전우수기자 jeus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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