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박
차박
  • 정경아
  • 2021.02.1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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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정경아 수필가
정경아 수필가
정경아 수필가

"여보, 차박 가자. 얼른 준비 해."

남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주말 오후, 집에 있는 먹거리만 간단하게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평일 내내 쨍쨍한 날씨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따라 날씨가 심술궂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나온 지 5분도 채 안 돼 차 앞 유리 와이퍼가 심드렁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바람까지 가세한다. 알레르기 비염을 앓고 있는 아이가 연신 재채기를 한다. 차박을 위해 침구를 챙긴다고 차 안을 들썩거렸더니 더 심해졌나 보다. 휴대용 공기청정기도 틀었건만 효과가 없다.

터널을 두어 개 지나 외곽으로 나와 몽돌해변 근처 주차장에 다다랐다. 비록 차 안이지만 바닷가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호젓해진다.

평범한 일상의 변화는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바이러스 확산의 정도가 심해지자 전염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범국민 사회운동이 됐다. 집에서만 생활한지도 꽤 지난한 시간이 흘렀다. 집콕(집에서만 생활하는 신조어)이 길어졌다. 온라인 세상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아무 놀이 집콕 챌린지'가 상위에 링크돼 있다. 무료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려는 기발한 시도들을 보니 웃음이 피식 난다. 하지만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칩거 생활이 장기간 이어지자 잡음이 새어 나왔다. 아파트 실내 스피커에는 한동안 전염병을 막기 위한 위생 운동 방송이 나오다가 이제는 층간소음을 조심하자고 강조했다. '어둑발 어두워져 집집마다 가림막을 걸어두었지만 새어나오는 소음을 막을 수 없다'는 어느 동시의 한 구절처럼 의자 끄는 소리, 발자국 소리, 아이들의 소란, 반려견이 짖는 소리 등은 이웃집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보다 훨씬 공격적인 불청객으로 침투했다. 민원이 속출했는지 날마다 삶의 볼륨을 더 낮추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가족 구성원끼리도 행동반경이 조밀해 부딪히기 십상이다. 나의 스트레스는 곧 너의 스트레스가 된다. 작은 실수에도 아량을 품던 마음의 곳간은 텅텅 비었다. 사소한 행동은 말썽거리가 되었다. 멀티탭 콘센트에 꽂아 둔 들쑥날쑥한 선들조차 같은 공간을 쓰는 누군가에게는 전혀 달가워 보이지 않은가 보다. 이또한 말다툼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글자글한 소리의 부딪힘이 필요하다. 일상 잡음을 이어폰처럼 꽂아 나만 듣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음소거로 살 수 없는 인생이 아닌가.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시급했다. 낚시를 좋아하는 배우자는 출조를 가지 못해 힘들어하고 아이들은 실컷 뛰어놀지 못해서 갑갑해 했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외곽으로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드라이브하고 싶었다. 저마다 원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조율이 필요했다. 접점은 '차박'으로 좁혀졌다. 거창한 캠핑 장비 없이 차 뒷좌석을 접어 이불을 깔면 5성급까지 아니더라도 안락한 숙소가 된다. 차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목적지는 어디든 상관이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해변에 텐트를 쳐 놓고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큼직한 텐트와 테이블, 의자 등 멋진 장비들이 눈길을 끈다. 같은 차박이라도 차량 트렁크와 텐트를 연결한'도킹텐트'를 펴고 즐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펴야 할 텐트도 의자도 없어 단출하다. 막 도착한 어느 이의 텐트 치는 과정을 말 없이 구경했다. 거미가 거미줄 짜듯 신중한 동작 곁에도 주말 하루가 서서히 흘러갔다. 

주차장 입구에는 여름철에 한창 펄럭거렸을 파라솔이 억센 줄에 동여 메어져 있다. 파라솔 둥치에 딸린 빈 의자 두 개와 나무 탁자를 빌려 쓰기 위해 인근에서 잡화를 파는 주인 할아버지께 물건을 이것저것 샀다. 야외에서는 고기를 구워 먹어야 제맛이 나지만 대신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예전보다 일거리가 줄어 힘들다는 속사정도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다들 고된 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고 위로를 실어 보낸다. 빈 고둥 껍데기가 쌓여간다. 고둥과 번데기의 짭조름한 국물처럼 남편의 진심이 우러나온다. 즐겨 피우기 않던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고단한 속내가 이해가 되었다. 거친 잔소리보다는 조금씩 줄이라고 남편을 다독였다. 비가 내려서 일몰을 보지 못한 건 아쉽다. 저녁 어스름이 해변가에 내려앉는다. 가로등에서 분무기가 뿜어내는 것처럼 환한 빗줄기가 분분하게 떨어진다.

"차박차박, 차박차박."
돌들이 파도에 구르는 소리가 듣기 좋다. 날이 서 있던 돌멩이 모서리가 자글자글 부딪히다 모가 닳아 둥글둥글해지는 게 우리네 모습 같다. 둥글어지는 면이 많아질수록 서로의 인생 무게를 맞대고 나눠 짊어지는 부분이 늘어갈 것이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옆에 있는 사람이 달라 보인다. 팍팍하던 남편은 그토록 내가 좋아했던 언젠가의 사근대던 연인으로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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