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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송은숙 시인

오디오북으로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듣다가 오네긴의 나이를 알고 조금 놀랐다. 오네긴이 친구 렌스키를 결투 끝에 죽이고 방랑길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러니까 온갖 풍상과 애환을 맛보고 쉴 곳을 찾아 돌아온 나이가 스물여섯이라는 것. 스물여섯이라니, 스물여섯이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거나 내디딜 준비를 하는 희망에 부푼 나이 아닌가. 그런데 푸시킨은 그 나이를 '지금은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나이로 묘사를 했다.

푸시킨이 살았던 19세기 초에 유럽의 평균 수명이 45세 정도였다고 하니 한편으론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같은 책에서 마흔을 '배가 나오고 소파에 앉아 꼬박꼬박 조는' 나이라고 표현하니까 좀 서글퍼졌다. 마흔을 훨씬 지나 환갑을 바라보는 나는 푸시킨 식이라면 이제 소파가 아닌 침대에 누워 지는 잎을 자신인 양 바라보고 있어야할 때 아닌가. 화려한 꽃을 피우거나 알록달록 아름답게 물든 기억도 없는데 오호라, 이제는 어느 자리로 떨어져야 할지 기웃거리며 고민을 해야 하다니.

물론 의료기술의 발달과 생활환경, 영양의 개선 등으로 평균수명은 꾸준히 증가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2020년 현재 83.5세라고 한다. 백세시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걸보니 평균수명은 100세를 넘어 120세도 가능할 것 같다. 수명을 결정짓는다는 말단염색체 길이를 늘이거나 아예 장기를 교체해가며 영생을 꿈꾸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유엔에선 인생의 단계를, 0~17세를 미성년, 18~65세를 청년, 66~79세를 중년, 80~99세를 노년, 100세 이상을 장수노인으로 나눠 나이구분을 새롭게 정했다고 한다. 청년기가 상당히 긴 셈이지만 이 구분대로라면 나는 아직 청년기에 해당하니 기분은 좋다. 하지만 이건 그저 심리적 위안일 뿐이고, 이런 데서 위안을 찾는다는 것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란 말에서 위안을 찾는 것만큼이나 나이 듦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어가니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란 에세이에 공감이 간다. 거기에서 키케로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것은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만들고, 우리 몸을 허약하게 하며,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가고,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시기라는 네 가지 이유를 들고 그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을 하고 있다.

우선 몸은 약해지지만 정신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그리스에서 최고 관직을 수행하는 '원로원'의 구성원이 실제 노인들이었다거나, 고령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소포클레스,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제논, 플라톤, 디오게네스 등 작가와 철학자의 예를 든다. 그리고 감각적 쾌락이 없어지는 노년이야말로 이성과 지혜를 밝히고 연구와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시기이며, 마지막으로 젊은이는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노인은 이미 오래 살았기 때문에 젊은이들보다 형편이 나은 셈이라며 노년의 삶에 대해 위무하고 있다. 

로마 시대의 평균수명은 약 25세로 지금으로선 믿기지 않을 만큼 짧았던 편인데, 이런 상황에서,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오랜 삶을 누리면서 노년에 대해 불평한다는 것은 욕심이 과한 게 아닌가. 그리고 키케로의 충고는 더 이상 보태고 뺄 것도 없이 노년을 대하는 정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키케로는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하다"며 "이런 자질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다"고 했다. 

물론 젊다는 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 같이 힘 있다." 민태원의 낭만적인 수필 '청춘예찬'이 아니라도 청년기는 그 힘이나 모습이나 열정이나 가능성으로 찬미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청년기는 활기에 넘치고 약동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미숙해 판단을 그르치기도 하는 시기다. 오네긴은 렌스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풀이로 렌스키의 약혼녀 올가를 유혹해 춤을 추고, 질투에 눈이 먼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들이 중년으로 접어든 나이였다면 죽음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행동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라든가 직장이라든가 각자 지키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어깨를 누르거나, 삶의 경험이 쌓여 상황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한발 물러서는 여유를 가질 테니까. 아, 청춘은 아름답지만 얼마나 무모하며 얼마나 미숙한 시기인가.

그러니 유엔이 정한 긴 청년기는 마음의 위안은 될지언정 실제 상황이라면 좀 문제가 생길수도 있겠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이 질풍노도기에 속해 아프니까 청춘이다, 흔들리니까 청춘이다 하며 도무지 안정을 찾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청년기처럼 생생하고 팔팔하다면 생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얼마나 강할 것인가. 나이가 들어 조금씩 몸이 약해지고 정신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은 삶에 대한 욕망을 조금씩 거두고 죽음을 준비하라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지.

공자는 60세를 가리켜 이순이라 했다. 귀가 순해진다는 것이니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을 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가장 이상적인 것은 청년의 심장과 노년의 귀를 갖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도 열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되 자기 고집만 내세우지 말고 주변의 소리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이상적인 노년의 모습이 아닐지. 해가 바뀌니 나이 듦에 대해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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