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곡유목'에 대하여
'각곡유목'에 대하여
  • 안성길 시인
  • 2021.04.0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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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안성길 시인·평론가
안성길 시인·평론가
안성길 시인·평론가

봄이다. 모두가 목을 빼고 내다보던 봄날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숲속 풀, 나무며, 벌, 나비까지 살아 숨 쉬는 것들은 죄다 계절의 혹독한 서슬에 가슴 오그리고 꽁꽁 옥죄었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쓰나미까지 연중무휴로 맹위를 떨치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모두가 목을 있는 대로 빼고 기다렸다. 기적의 백신 같은 막연한 그 무엇인가가 번쩍 나타나 저 무기력했던 나날들을 싹 다 갈아엎어줄 것 같은 절대의 힘을.

그러나 막상 봄은 도둑고양이처럼 와서 내 거친 볼을 비비는 아침햇살처럼 주변을 서성이고, 딱히 할 말은 없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여전히 코로나19는 눈을 부라리고 있고 마스크와 함께하는 비루한 일상은 지속되지만 그래도 애써 참고 기다린 보람은 있다. 지병으로 생의 벼랑까지 갔을 때, 내 발로 침대를 내려갈 수 있기만 소망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 필자에게 한 계절을 무사히 잘 보냈으니 그게 어딘가.

칙센트미하이(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한 심리학 저서에서 '행복한 사람'보다는 '사람은 언제 행복한가'로 바꿔 '행복'을 논하며, 그는 사람에게 목표가 있고 그에 혼신으로 열정을 쏟는 몰입(Flow, 沒入)의 순간을 맞으면 행복이라 했다. 즉 작고 소소한 일상이라도 무아지경 몰입해 획득하는 소위 실현가능한 목표의 정립, 그것에의 몰입, 그 결과 성취와 기쁨의 획득이란 나선형적 선순환을 행복한 삶으로 제시한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행복이나 이상을 원대한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일생을 두고 헤매다가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행복의 표상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아동극 6막 12장 『파랑새』의 희곡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파랑새'를 집의 새장 속에서 늘 보던 새로 그리고 있다. 

잠시 그 희곡 안을 조금 살펴보면, 산골의 가난한 나무꾼의 아이 틸틸과 미틸 남매에게 어느 날 밤, 할머니 요정 베릴린느가 찾아와, 아픈 여자애가 소원하는, 온몸이 파란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틸틸과 미틸은 곧장 기억의 나라, 밤의 궁전 등을 차례로 돌며 밤새 신기한 온갖 모험을 하지만 그들은 파랑새를 끝내 찾지 못하고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일어난 남매는 자기 집 새장 안의 새가 어제보다 더 파랗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틸틸과 미틸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새가 사실은 늘 함께 살던 그 평범한 새였던 것이다. 이처럼 '늘 함께 살던 그 평범한 새' 즉 평범한 하루하루라는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일상적 삶은 꾸밈없고 소박하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진실한 감동과 울림의 진폭을 가져다주는지도 모르겠다. 아래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그런 수수한 삶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부분)


늦은 밤 한갓진 겨울 역사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만큼 소시민적인 모습도 없을 것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의 현란함에 묻혀 그들을 더욱 휘황찬란 돋보이게 해주는 배경이 될 뿐, 그 어떤 눈길도 오지 않지만 굳이 스스로를 꾸미거나 보란 듯이 도드라지는 일 없다. 그냥 주어진 자리에 열심히 뿌리 내리는 나무나 강돌처럼 살지만 그들 역시 엄연한 하나의 우주적 존재다.

그런 그들을 "한줌의 톱밥"으로 온기를 지펴 싸안아주는 "톱밥난로"는 어쩐지 그들을 "한줌의 눈물" 곧 연민의 눈길로 싸안아주는 시인의 더운 가슴 같다. 그리고 위 시에는 두 번이나 "그리웠던 순간"이 나타난다. 사람은 누구나 짧던 길던 빛나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청운의 꿈을 꾸거나 이루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하다못해 이 지구별에 젓발 디딜 때처럼 환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의 유일한 방향은 행복 쪽이다. 그 행복은 비록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 즉 보잘 것 없고 소소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저쪽이 아랫목처럼 뜨거워 오는 모습일 터이다.

각곡유목(刻鵠類鶩)이란 말이 있다. 새하얀 백조를 새겼으나 오리 비슷해지고 말았으니, 졸렬한 능력에도 큰 이상을 품었다가 죽도 밥도 안 된 걸 비꼬는 말이다. 그런데 각도를 달리하면 처음 생각보단 못하지만 비슷하게는 이뤄냈다는 것인데, 필자는 후자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꿈은 누구나 꾸지만 온전히 이룬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모두가 나아가는 방향은 높고 먼 곳에 두더라도 눈앞의 목표는 위 시 속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챙기듯 일상의 자잘한 것부터 하나씩 해내어 소중하게 대하고 즐기는, 소위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으로 노력해 행복 혹은 꿈에 근접하는 삶을 살다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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