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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국가정원에 수레국이 지천으로 피었다. 아련한 색을 가진 수레국 구경 갔다가 강종거리며 가는 하얀 강아지를 보았다. 키가 꽃에 닿는 것도 아닐 텐데 만면에 웃음이다. 개가 웃다니. 무슨 개가 웃을 소리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에게도 기쁨, 슬픔, 울음, 웃음 등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재복이를 통해 배웠다. 내게 비타민 같은 재복이는 딸이 키우는 강아지다. 견종은 포메라니안이고 두 살이다. 고관절 수술 후 아직도 치료 받는 자그마한 개다. 파양 직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입양하게 되었다는 것은 딸이 마련한 변명이다.

 아이 한 명 키울 만큼 정성과 시간과 비용이 만만찮아 보이고, 개의 입장에서도 종일 혼자 방치되는 것 같아 보여서 처음엔 반대했는데, 막상 녀석을 만나고는 그런 마음이 많이 바뀌었다.
 '개에게는 언어도 있고, 사회성도 필요하고, 어릴 때부터 어미로부터 살아가는 방식과 예의도 배우고……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더라' 가끔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이 보이면 곁에 선 친구에게 아는 척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부분 친구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손자를 키웠던 한 친구는 '애기 데리고 산책 나가면 흙도 만지고 풀도 만지고 노는데 개들이 오줌 싸면 아가들은 어쩌란 말이냐. 사람은 노상방뇨가 위법인데 개는 왜 말리지 않느냐.' 항변한다. 할 말이 막힌다.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말인데 무슨 반론이 필요할까. 

 그런데 개의 입장에서 보면 밖에 나와서 찔끔거리는 그 소변이 개들끼리 소통 방식이란다. 소변 보고 냄새 맡고 하는 일을 마킹이라고 하는데, 이 마킹이 '너 잘 있니?' '난 괜찮아' '나 이번에 이사 온 아무개야'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언어란다. 그러니 산책을 반대하고 마킹 못 하게 한다면 개의 입을 막고 말을 뺏는 꼴이 되는 셈이다.

 지난해 며칠 딸집에 머물렀다. 그때 재복이의 산책길에 몇 번 동행했는데, 거기에서 나는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애견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는 공원 한 쪽에 50여 평 정도가 개들의 동산으로 묵인된 곳이 있었다. 그날 내가 본 개는 20여 마리 정도, 오자마자 목줄부터 풀어 주었고 그곳에서만큼은 마음껏 친구들과 뛰어 놀게 하였다. 보호자들의 호칭은 개의 엄마, 아빠, 누나, 형이었다. 나는 재복이 할머니로 소개되니 유치원 자모들 모임에 간 것처럼 낯설고 신기했다. 눈여겨보니 개들끼리도 친한 개와 그렇지 않은 개가 보이고, 견종마다 활동 정도나 성격도 보이고 버릇없이 으르렁거리거나 시비를 거는 개도 눈에 들어왔다. 보호자들은 그런 모든 문제를 서로 의논하고 학습하고 고쳐나가려 애쓰고 있었다. 

 반려동물에 대해 이해하기 전까지는 나도 애기가 타는 유모차에 개 싣고 다닌다고 혀를 찬 사람 중 하나다. 그날도 두 마리가 유모차를 타고 왔는데, 한 마리는 노견이라 걷기 힘들어서 바람 쐐주려고, 또 한 마리는 고관절 수술 후 우울증이 심해서 친구들 만나게 해주려고 왔단다. 그러면서 누구네 개는 치매고 누구네 개는 암이고, 누구네 개는 눈이 멀고 귀가 멀어간다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주 대화 내용이었다. 
 다음날은 혼자 재복이를 데리고 동산으로 나갔다. 개들은 마치 놀이동산에 온 어린애들같이 흥분했다. 보호자들은 간식을 나누어 먹이기도 하고, 개가 흥분해서 똥을 싸면 배변봉투에 집어 가방에 넣기도 하고, 싸움을 걸거나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야단도 치고 하면서 그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문화를 내 눈으로 보고 듣지 못했다면 아직도 개들이 사람이 누려야 할 공원 일부를 망친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울산에도 그런 동산이 하나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려동물 2,000만 시대란다. 건강한 반려동물이 보호자에게 밝은 기운을 주고, 그 기운이 사회에 환원되는 것이라면 이는 긍정적 요소가 되리라. 키우는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이나 페티켓(Pet 애완동물+Etiquette 에티켓)을 숙지해서 서로 조심하고, 이해한다면 사람도 동물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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