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떨결에 
 
고증식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
다신 수술 안 받겠다고 선언하고
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
누구는 애통해하고
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
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 
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
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
남자들 군대도
멋모를 때 한번 가는 것 아니냐고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죽을 때도 아마 그럴 거라고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얼떨결을 노래하던 당숙은
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
앞뒤 마당도 싹싹 빗질해 놓고
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
 
△고증식 : 1959년 강원도 횡성 출생.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4년 '한민족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옴. 밀양 밀성고등학교 재직. 한국작가회의 이사 역임. 시집 '환한 저녁' '단절' '하루만 더' '어떨결에'. 시평집 '아직도 처음이다'.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죽음으로 이별을 맞이하는데도 슬픔과 애틋함 보다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함이 시 전반에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욕심 없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느긋함으로 노후를 정리하는 모습이 읽혀진다. 그리고 삶도 죽음도 순간일 수 있다는, 그래서 어쩜 더 죽음에 대해 드라이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내면이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에 애착이 가는 삶도 어느 순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싱거운 일임을, 시인은 당숙을 통해 우리의 생이란, 죽음이란 어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인 얼떨결에 결정됨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팔순의 나이는 뭐가 무서울 것이 있을까. 그러나 수술 후의 아픔이 무섭다는 아이 같은 순수를 보여 줌으로써 시인의 맑은 내면이 보인다.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당숙을 내세워 시인은 삶과 죽음을 심각하기보다 단순하게 여기는 그 속에 삶의 지혜를 부려 놓는다. 아마도 시인이 꿈꾸는 노후도 그러하리라.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뭉클하게 가슴 한쪽을 쿵하고 치고 있다. 시인의 속마음이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차분히 삶을 정리하듯 남은 사람을 위해 씨앗을 준비하고 마당을 빗질하여 생에 대한 미련 없듯 빈방에서 깊은 잠에 드신 당숙은 시인이 염원한 생의 마지막 모습의 희망일 수도 있겠다. 흔히 이야기하는 잠자듯 죽을 복이 가장 큰 복이라고. 애통한 이별을 아름다운 마지막으로 당숙을 보내드리고 싶은 시인에겐 당숙은 시인의 페르소나인 것이다.
도순태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