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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회사가 많은 울산의 오일 허브항을 오가는 선박들에게 인사하듯 허리 숙인 피사의 등대. 유재환 jaihoan@hanmail.net
정유회사가 많은 울산의 오일 허브항을 오가는 선박들에게 인사하듯 허리 숙인 피사의 등대. 유재환 jaihoan@hanmail.net

나는 지금 피사로 간다. 피사라는 이름의 등대로 차를 타고 달려간다. 온산 앞바다의 울산신항 남방파제에 있는,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지게 만들어 피사의 등대로 이름 지어진. 재작년까지는 고래관광유람선으로 둘러볼 수 있는 코스였으나 지금은 피사도 코로나를 앓고 있다. 바다에 떠 있으니 지번으로 찾아가긴 어렵다. 울주군 온산읍 이진리 소재의 당월방파제가 지도로 본 최적의 장소. 여러 컨테이너 부두와 공단을 들락거리던 한순간 안개를 몰고 차창으로 훅 밀려드는 우뚝한 몸체!

 그들 가까이 두근두근 다가간다. 오른편엔 늘 그 자리에 붙박인 바지선, 왼편엔 강태공 몇이 테트라포드에 서서 파랑이 일렁이는 물속을 주시하고 있다. 해초가 뒤덮인 바윗돌 너머로 빨강, 노랑, 하양의 등대 3기가 정체를 드러낸다. 빨강과 하양이 피사의 등대. 서로에게 닿고자 몸부림하던 연인이 나란히 몸을 틀어 어디론가 끌려가는 자세다. 허공은 물보라가 만든 안개 알갱이를 흩날리고. 공중에 기대어 선 빨강과 하양은 서로를 반영하는 하나의 몸 같다. 배경은 고정되지 않은 느린 동영상. 골리앗 크레인과 무역선이 파랑에 밀려 빙글빙글 돌아간다. 천천히 더 천천히, 그러다가 깊고 푸른 물속으로 잠수해버릴 듯하다. 눈앞에는 나처럼 바다를 망망히 바라보는 한 존재가 있다.

 "피사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으셨네요."
 피사바라기인가, 물안개에 어리치는 인어인가? 그는 분명 사내였다. 그 옛날의 수부나 화부같이 멜빵 달린 푸른 옷차림으로. 내가 이곳에 오기를 기다려 온 사람처럼. 이내 나를 돌아보던 그윽한 눈길을 등대로 던진다. 그와 나 사이는 첫 만남치고는 약간 민망한 팔 하나 길이의 간격이다. 부처님오신날에 절 세 곳의 등불을 밝힌 공덕일까? 처음 마주한 바다에서의 이상야릇한 기분이 빨강과 하양 쪽으로 흘러갈 때 그가 말을 잇는다.

 "낚시꾼에게 더 잘 알려진 곳이죠. 남방파제는 배로 들어갈 수 있어요. 장생포 부두에서 20여 분 걸리는데 코로나 때문에 관광은 어렵습니더. 그래도 낚시하는 사람들은 매일 배를 탑니더. 여기서 1㎞ 거리라 피사의 키가 작아 보여도 아파트 8, 9층 높이에다가, 남방파제의 끝에서 끝까지는 30분을 걸어야 합니더. 요기 요 앞에, 육지와 직각인 방파제는 범월갑 방파제라 부르고, 온산공단에서 뻗어 나가 동해로 향해 있어요. 매립으로 그 많던 갯바위는 사라졌지만 바닷바람 쐬며 걸어서 들어간 흰 등대는 볼거리였는데. 요기도 낚시꾼에겐 별천지였습니더, 쓰레기 민원과 사망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은 길을 막아버려 가고 싶어도 못 가요"

 그의 전화벨이 울리고 이야기가 끊긴다. 비 소식을 머금은 하늘과 불 꺼진 등대의 어느 접점에서 문득, 희미한 등불을 밝힌 시구가 당도한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중략)//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하략.) - 박인환 '목마와 숙녀'

육상에서 길이 600m 뻗어 나온 범월갑 방파제 끝자락에 선 하얀 등대는 바닷길 300m에 떨어진 붉은 등대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유재환 jaihoan@hanmail.net
육상에서 길이 600m 뻗어 나온 범월갑 방파제 끝자락에 선 하얀 등대(사진)는 바닷길 300m에 떨어진 붉은 등대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유재환 jaihoan@hanmail.net

 "빨간 등대 방파제는 해안선과 나란한 섬입니더. 2010년 개방 시기엔 해맞이 기대로 떠들썩했지요. 전망대, 공연장, 낚시터, 안전 가드레일, 화장실이 설치돼 있어서 사람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얼마 전에 뉴스로 보니까 태풍에 휩쓸려 가드레일은 부서지고, 관리까지 소홀히 하는 바람에 방치 상태더라고요. 관광자원으로 개발한다더니 말짱 황이 된 거죠. 파도를 막고 휴식공간도 예정한 매립이었지만 너울이 쓸어버릴 땐 방법이 없으니깐. 공공재를 함부로 대하는 시민의식도 문제고요. 점점 해수면이 상승하고 태풍의 강도가 심해지니 올해부터 방파제를 확장한다는 소식도 들리네요. 작업 과정 동안 시설을 보강한다는데."

 테트라포드 쪽에서 갑자기 함성이 들린다. 한 남성이 들어 올린 낚싯대에 물고기가 팔딱거리고 있다. 마스크로 가린 웃음이 보이는 듯하다. 조그만 아이스박스를 곁에 둔 걸로 봐서 적어도 서너 마리는 잡았을 테지. 오늘 저녁의 메뉴는 쫄깃한 바닷고기 회에 얼큰한 매운탕에 시원한 소맥 한 잔을 꿀맛으로 기울이겠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거세지는 태풍에 대응키 위해 지난 4월 초 부터 보강 공사에 들어간 울산신항 남방파제 공사 조감도. 울산지방해양수산청 제공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거세지는 태풍에 대응키 위해 지난 4월 초부터 보강 공사에 들어간 울산신항 남방파제 공사 조감도. 울산지방해양수산청 제공

 "휘어진 낚싯대를 보니 생각이 나네요. 저 등대의 기울기가 15도랍니더. 피사의 사탑이 5.5도 기울기라는데 15도나 되니 제법 삐딱하게 보이지요. 지반이 약해서 그리됐다지만 기울어져서 되레 세계적인 명소가 된 피사의 사탑처럼, 우리의 피사도 새로 단장해서 유명해지면 좋을 텐데 말입니더" 

김려원 (시인)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climbkbs@hanmail.net

 두 등대가 나란히 서 있어서 방파제가 붙은 것처럼 보인다니까 웬걸, 300m나 떨어져 있단다. 더군다나 빨강과 하양 사이는 족히 600m나 된다니, 내 눈으로 보면서도 내 눈을 의심하고야 만다. 그만한 너비가 아니면 어떻게 저 큰 배들이 들락거리고 있을까 마는.

 흐린 하늘 안쪽에서 별이 뜨고, 인적 끊긴 등대와 들끓는 온산공단이 밤하늘을 밝힐 시간이다. 생기발랄했던 등대의 나선계단은 여전히 먼 바다의 심장을 향해 불을 밝히겠지. 뱃고동 울리며 빨간 등대 불빛을 마주한 뱃사람은 등대의 왼쪽을 돌아서, 하얀 등대 불빛을 바라본 뱃사람은 등대의 오른쪽을 돌아서 기다림의 항구 쪽으로 서서히 속도를 줄일 것이다. 이윽고 사람의 발길 그치고 뱃고동마저 잠잠해지는 순간이면, 누군가의 손을 끝내 뿌리친 빨강과 하양의 연인이 파도의 울음을 품고 서로를 끝없이 안으리라. 깊은 어둠 속에서도 수많은 별은 소리 없는 운행을 계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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