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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을 지켜낸 노화랑 '죽지'. U울림통(48)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때 화랑 죽지랑((竹旨郎)은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죽지랑은 젊은날 화랑 김유신의 맞수였으나 성장해 삼국통일 전선에 부사령관으로 활약하며 김유신 오른팔로 여러 전쟁을 치뤘고 진덕여왕 부터 신문왕까지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왕을 보좌했던 통일 영웅이다.
 
 삼국통일은 신라의 많을 것을 바꾸었다. 진골도 왕위를 승계할수 있게 되자 권력 다툼은 더 치열해졌고 왕족과 귀족들의 암투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 난을 계기로 화랑제는 존폐 위기에 처한다. 화랑 전성기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김춘추와 김유신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1백여명이 넘는 화랑들은 여전히 백전노장 죽지랑을 따르며 존경했다. 그중 유난히 죽지를 따르던 득오(得烏)가 어느날 열흘이 넘도록 보이지 않아 찾아 보니 모량부(牟梁部) 출신 관리인 익선(益宣)이 그를 부산성(富山城, 경주시 서면 천촌리) 창고지기로 쓸려고 급히 데려가 미처 하직 인사도 못하고 떠난 것이었다.

 화랑들이 추앙했던 통일 영웅 죽지랑은 개탄스런운 상황에도 떡과 술을 챙겨 면회를 가니 밭을 갈던 득오를 불러 음식을 먹이고 익선을 만나 그의 휴가를 청했으나 단번에 거절 당했다. 마침 지나가던 다른 관리가 이를 보고 안타깝게 여겨 쌀 30석과 자신의 말 안장까지 얹어 건네자 그제서야 겨우 승락을 받았다.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선왕 신문왕이 '역적의 잔가지와 잎사귀 그리고 흉포한 무리를 쓸어냈다'고 담화문까지 발표하며 가야계 진골 세력과 그들의 지지 기반인 화랑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고를 남겼으니 그사이 세상의 이치도 바뀌고 군을 이끌어 가던 화랑이 밭을 갈고 문지기로 전락하며 그 위상이 땅에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죽지랑의 일이 널리 퍼져 화랑 책임자 화주(花主)의 귀에까지 들어가니 익선을 잡아서 그 자의 더러움을 씻어주라며 체포령이 떨어진다. 이를 알고 익선은 황급히 달아났다. 집에 있던 익선의 아들이 대신 잡혀 벌을 받으니 차가운 연못에 빠뜨려서 얼어 죽는 형벌이었다. 

 또 이를 보고 받은 효소왕은 익선과 같은 모량부 출신 벼슬아치들을 모두 쫓아내고 승려들은 종을 울리고 북을 치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으니 모량부에서 더이상 관리와 승려가 배출되지 못했다. 죽지랑을 도와 익선에게 자신의 쌀을 내어준 관리 간진(侃珍)의 자손에게는 왕이 상을 내렸다. 그 후 득오는 죽지랑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지었는데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라는 향가로 널리 알려졌다. 
 
 이 향가속에는 나이든 화랑이자 재상이었던 죽지랑이 일개 벼슬아치에게 수모를 당활 정도로 화랑의 위세가 약해지는 과정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며 신라가 통일 이후 바뀌어 가는 형세를 가늠하게 된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모죽지랑가>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니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
 아름다운 모습에 주름이 지니 눈 돌릴 사이에 만나 보게 되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 가는 길에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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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조양동 효소왕릉의 전경. 2021. 2. 20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경주시 조양동 효소왕릉의 전경. 2021. 2. 20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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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보기 : 장창호TV [50] 죽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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