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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왕, 그 시호의 사연은? U울림통(51)

 성덕왕(聖德王)의 두번째 아들 승경(承慶)이 16살에 왕위에 오르니 신라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이다.  

 외조부 김순원(金順元)이 자신의 딸을 효성왕의 왕비(혜명왕후 김씨)로 삼고 권력을 키워 나가자 다른 왕비의 세력과 암투가 생겨 귀족 간의 권력 갈등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또 지진, 유성 출현, 핏빛으로 물든 강물, 월성(月城)에 나타난 여우의 울음 등 여러 가지 변고에 관한 기록도 남아있다. 즉위 6년만에 효성왕은 숨지고 유언에 따라 화장돼 유골은 동해에 뿌려져 왕릉이 없다. 선대왕인 증조할아버지 문무왕 처럼 죽어서 왕릉을 세우지 않고 유골을 바다에 뿌리라는 유지를 남겨 시호(諡號)가 효성(孝成)이다.  

  왕자 승경은 바둑을 좋아해 신하 중에 신라 바둑의 최고 고수 영종과 자주 대국을 벌였다. 그리고 그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고 총애를 했으나 혜명왕후 김씨와 외척 세력의 견제가 심해지고 심지어 후궁을 죽이려 하자 영종이 딸을 지켜내기 위해 모반을 일으키려다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다. 

 나라 밖으로는 왜의 침입도 계속돼 성덕왕때 신라 외곽성인 관문성(모벌군성)을 쌓았는데 인근 모화(毛火)의 지명은 불화살로 왜구의 머리로 태웠다는 뜻에서 생겼다고 한다.  

 장창호 작가는 왕비 보다 후궁을 사랑했던 효성왕이 의문에 휩싸인 죽음에 이른 것을 외척과 권력 갈등이 있었을것이라 보면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선왕들의 뜻을 이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 했던 어린 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점인 울산시 북구 천곡동과 경주시 외동읍 관문성의 전경. 신라 성덕왕때 울산항으로 진입한 왜군들을 막아내기 위해 지어졌는대 모벌군성(毛代郡城) 혹은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고도 불렀다. 울산시 사진출처
울산과 경주의 경계 지점인 울산시 북구 천곡동과 경주시 외동읍 일대에 축조된 관문성의 전경. 신라 성덕왕때 울산항으로 진입한 왜군들을 막아내기 위해 쌓았다. 모벌군성(毛代郡城) 혹은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고도 불렀다. 울산시 사진출처
지난 2017년 2월 경주 구황동 낭산 인근에서 발견된 미완성 왕릉의 모습. 발굴 조사를 벌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죽거든 화장한 뒤 동해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겨 왕릉 조성 작업이 중단된 효성왕릉의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지난 2017년 2월 경주 낭산 인근 구황동에서 발견된 미완성 왕릉의 모습. 발굴 조사를 벌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죽거든 화장한 뒤 동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겨 왕릉 조성 작업이 중단된 효성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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