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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송은숙 시인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라는 다큐를 보았다. 거두고 남은 이삭, 그러니까 일종의 부스러기를 주워 생활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엔 다양한 종류의 이삭들이 나온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유통기한이 지난 빵, 소세지, 피자들. 야채시장 한쪽에 모아둔 시든 오이, 양배추 등.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거두어 간다. 

물론 바르다의 다큐는 끊임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현대의 소비 행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 양산되는 쓰레기를 주워서 생계에 보태고 삶을 유지해가는 쓰레기의 순환에도 관심을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 순환의 흐름에 애정을 보이고 있다. (이때 쓰레기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라 이삭이 된다.) 사적인 빈민구제의 한 형태랄까. 예컨대 일부러인지 일손이 부족해서인지 수확을 하지 않은 감자밭이나 사과나무 과수원이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상자와 바구니를 들고 이런 것들을 양껏 따갔다. "너희 포도를 남김없이 따 들여서는 안 되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를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란 레위기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이 다큐를 본 뒤에 우리나라는 어떤지 마트나 시장에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가 자주 가는 마트에서는 알뜰코너를 만들어 유통기한이 다 되어 가는 식품을 할인된 가격에 팔고 있었다. 시간대가 맞지 않았는지 시장에서도 버려진 채소나 과일은 보지 못했다. 최근엔 모 인터넷 사이트에 한강 시민공원에서 주운 음식쓰레기인데 충분히 먹을 만하다면서 쓰레기통에서 수거한 음식물 사진이 올라온 적이 있다. 먹다 남은 피자, 햄버거, 콜라, 맥주 등 더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쓰레기로 잔뜩 버려져 있었다. 마트에선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까지 알뜰히 이용하려 하는데 소비자는 멀쩡한 음식을 한두 입 먹고 버린다니 뭔가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다큐엔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이 나온다. 다큐 제목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림의 전면엔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는 세 여인이, 뒷면엔 이들을 감시하는 감시원과 수확한 밀 더미를 실어 나르는 마차와 사람들이 있다. 이삭을 주워 생활하는 건 당시 최하층민의 삶이었을 테니,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그림이다. 물론 우리 어렸을 때도 이삭을 많이 주우러 다녔다. 감자나 고구마를 캔 뒤에 미처 캐지 못한 작은 것들을 거두거나, 벼나 보리를 벤 뒤에 망태기 같은 걸 들고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으레 아이들의 일이었다. 이 일은 별로 힘들지 않고 샅샅이 훑으면 제법 수확도 뿌듯하여 기꺼이 나서곤 했다. 물론 이건 자기 밭의 일이니 그렇지 만약 남의 밭이었다면 창피하다고 몸을 뺐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추수하고 탈곡한 뒤 볏짚을 사료로 쓰기 위해 원형으로 말고 사일러스지로 포장하는 일이 기계를 이용해 거의 논스톱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논엔 이삭이 거의 없다. 하긴 이삭이 있다고 한들 누가 주우러 다닐까. 도시에서의 이삭도 넘쳐나는 판국에.

그 이삭을 바르다는 가난한 사람의 몫으로 여기며 그것을 거두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당당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게 그저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것뿐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성경에도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했던 룻이란 여인이 나온다. 룻이 그 밭의 주인 보아즈와 결혼하여 나은 자식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니 다윗은 '이삭 줍는 여인'의 후손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삭은 사용하고 남은 여분이나 부스러기라는 의미 뿐 아니라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삭이 꼭 농작물 같은 음식만은 아니다. 버려진 가구, 생활용품, 의류 등 누군가 다시 사용한다면 그것이 이삭이다. 그러니까 이건 생각의 문제이다. 버릴 만한 것이라도 더 쓸 수 있는지, 달리 쓸 수 있는지 궁리하는 삶. 혹은 버려진 것을 새롭게 이용할 수 있는지 궁구하는 삶. 반쪽이로 유명한 시사만평가 최정현 작가는 고철 등을 이용해 기발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이삭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온 경우이다.

코로나 시국이 길어지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빈곤층은 더욱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어떤 지역에선 길가에 냉장고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누구든지 나누고 싶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필요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게 하는데, 냉장고가 비지 않고 늘 채워져 있다는 소식이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냉장고에 음식을 넣는 사람인지 가져가는 사람인지 잘 모를 테니 낙인 효과에서 자유롭고, 큰돈을 들이지 않고 남을 도울 수 있고, 특히  삶과 직결되는 '먹는다'는 근원적인 욕구를 채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냉장고가 유지되는 까닭인 것 같다. 냉장고에 넣은 음식은, 남는 것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이삭이라 할 수 있고 이 역시 이삭의 선순환인 셈이다. 

바르다는 취재를 위해 이동을 할 때 가끔씩 손을 뻗어 트럭을 잡는 시늉을 한다. 뒤따라오는 트럭이 손가락이 만든 동그라미 안에 잡힌다. 바르다가 이삭을 건진 셈이다. 삶의 진솔한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라는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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