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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의 생애

박종해

나는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나의 온몸에 삼라만상을 담고 산다.
그래서 온몸으로 세상을 본다.
몸 전체가 하나의 눈이기 때문이다.

풀여치나 방아깨비 같은 작은 미물까지
모두 잠든 밤에도
나는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세상을 본다.

이렇게 작은 풀잎 위에 집을 짓고
하루 밤을 천년 세월처럼 지내다가
신의 말씀으로 빚은 해오름이 되면
나는 미련 없이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겨우 한 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풀잎의 집에서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렇게 간단한 삶의 한 때를 
천년을 살다갈 듯이 서로 상처 주며
고통과 고뇌를 내 몸속에 새기며 살아오다니.
 
△박종해: 1980년 '세계의 문학'에 김종길, 유종호 추천으로 등단. 시집 '이 강산 녹음방초'(민음사), '소리의 그물'(서정시학) 등 11권과 '시와 산문선집' 1권을 출간함. 이상화시인상, 성균문학상, 대구시협상, 울산문학상, 울산광역시문화상, 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 등 수상. 울산문협 회장, 경남문협 부회장, 울산예총 회장, 북구문화원장 등 역임. 
 
이른 새벽에 풀잎에 맺힌 '이슬'을 지나치지 않고 세심히 들여다본다면 그는 시인이다. 이슬의 얼굴을 빤히 보며 눈 맞추고 무언의 질문을 하고 있다면 그는 시인이다. 그가 묻고 이슬이 대답하는 말을 적으면 한 편의 詩가 된다. 


 박종해 시인의 시 '이슬의 생애'는 이슬이 하는 말을 통해 이슬 스스로의 생을 묘사한다. 시의 시작은 이슬의 탄생, 혹은 등장을 그리고 있는데 그 장면이 참으로 고요하고 장엄하다. 나는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나의 온몸에 삼라만상을 담고 산다, 이 두 행을 읽는 순간 경건한 영상이 펼쳐지는 듯하다. 풀잎 위에 앉은 아주 작은 몸의 이슬 하나가 등장할 뿐인데 뭔가 시원의 바닷길이 열리는 듯 신비롭다. 그의 <온몸>인 동그라미는 몸 전체가 하나의 눈이 되어 세상을 보고 있다. 그런 이슬의 모습을 시 속에서 내(독자)가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온몸으로>라는 말을 이슬과 동의어로 배치하여 이슬의 정체성을 극대화한다. 첫 연 전체의 이미지는 주로 시각적인데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고요의 소리, 소리를 다 지우고 <눈>만 하나 제시하고 있을 뿐인데 나의 귀는 자꾸 그 고요 쪽으로 쫑긋 긴장하게 된다.


 이슬이 시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주로 생의 짧고 덧없음을 비유하거나 깨끗함과 아름다움의 메타포로 쓰이곤 한다. 헤르만 헷세는 그의 시 <연인에게로 가는 길>에서 "세상은 이슬에 취하여 반짝인다"라고 노래했다. 또 "풀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이란 노랫말(시)에서도 이슬은 아름답고 영롱하게 그려진다. 반면 박종해 시인의 시 '이슬의 생애'에서는 이슬의 짧은 생과 덧없음을 그리고 있다고 하겠다. 시에서 이슬은 떠나는 때를 알고 있다.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그때는 바로 해오름, "신의 말씀으로 빚은 해오름"이 오면 이슬은 자신이 미련 없이 떠나야 할 것을 알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겨우 한 뼘"임을 풀잎의 집에서 이미 깨닫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덧없음을 한탄이나 허무로 치닫지 않는다.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한 시인이 말했다. 시는 온몸으로 질문하는 것이라고 또 한 시인은 말했다.


 박종해 시인은 말한다. 온몸으로 한 생을 살아가는 이슬의 말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말한다. "모두 잠든 밤에도 나는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세상을 본다"라고. 이슬의 생애, 가장 소중한 가치관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 말한다. 천년을 살 듯 서로 상처주지 말자고, 간단한 삶의 한 때를 고통으로 새기지 말자고, 이슬의 몸을 통해 박종해 시인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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