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클립] 울어라, 경애왕
[오디오클립] 울어라, 경애왕
  • 장창호 극작가
  • 2021.08.24 09:13
  • 0
  • 온라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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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울림통] 장창호가 들려주는 삼국유사 (63)

 신라 경명왕이 일찍 숨지자 동생인 상대등 위응(魏膺)이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된다.

 경명왕에게 아홉자식이 있었으나 아무도 왕위를 맡으려 하지 않았고 물려 주려 하지도 않았다.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 의존하며 후백제를 견제하려했다. 
 
 고려에 볼모로 있던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으면서 고려와 후백제의 화친은 깨진다. 견훤은 인질로 있던 왕건의 사촌 동생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동원해 웅진(熊津)까지 진격했다. 후백제와 고려가 다시 대립하자 경애왕은 고려로 사신을 보내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방어만 할 뿐 후백제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후백제는 음력 9월 대대적으로 반격을 시작해 근암성(경북 문경시 인근)을 함락시키고 고울부(高鬱府 경북 영천시)도 점령했다. 경애왕은 고려로 원병을 청해 후백제의 침공을 물리치려 했으나, 견훤은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해 경애왕을 죽였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왕비와 후궁,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느라 적병이 쳐들어오는지도 몰랐으며, 견훤의 군영으로 잡혀간 뒤에 위협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왕비와 비첩들도 견훤과 부하들에게 능욕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석정은 길이 20여m 물길이 굴곡지게 돌로 만든 수로이다. 흐르는 물길에 술잔을 띄워 보내 자신 앞에 술잔이 올때 까지 시를 짓고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3잔을 마신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4세기 중국 동진시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포석정은 일제감점기에 철거 후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그 원형을 잃었다. 견훤이 포석정을 덮친 시기는 음력 11월로 한 겨울이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점에 국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 견훤에게 죽음을 맞이한 당시 상황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신라 국왕들의 연회 장소로 알려진 포석정은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포석사(鮑石祀)'라는 제사시설이라는 기록되어 있어 주목 받고 있다.

 경애왕이 죽자 견훤은 왕의 이종사촌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이다.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해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매장했는데, 경주시 배동에 위치한 경주 경애왕릉은 해목령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 해목령 가까이에 위치한 일성왕릉(逸聖王陵)이 경애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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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보기 : 장창호TV [65] 울어라, 경애왕

경주 배동 삼릉 옆에 자리한 경애왕릉. 2020. 8. 14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경주 배동 삼릉 옆에 자리한 경애왕릉. 2021. 8. 14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후백제 견훤이 쳐들어와 신라 경애왕이 최후를 맞은 경주 배동 포석정(鮑石亭)의 모습. 2020. 7. 26 김대웅 제공
후백제 견훤이 쳐들어와 신라 경애왕이 최후를 맞은 경주 배동 포석정(鮑石亭)의 모습. 2020. 7. 26 김대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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