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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이대로 굉장하다*

김성춘
 
바람 부는 날 경주 아랫시장 여여심如如心보살 만나러 간다 막걸리 집에서 막걸리 마시다 일어선다 나이가 드니 모두가 친구다 대릉원의 까치도, 어제 만난 옛 기왓장도, 게이트 볼 친구 팔순의 김영감도 친구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준비할 것은 미리 준비할 줄 안다는 것, 세월도 풀잎도 슬픔도 모든 것은 다 떠나가는 것, 모든 것이 물거품 같고 수수께끼 같고 눈물 같다 수수께끼 같아서 살아 볼만한 오늘이고 내일은 분명히 오고, 오늘의 물소리는 오늘의 물소리다
 점쟁이 집 문을 연다 뭐 하러 왔어? 팔월에 큰 비를 만나겠어, 큰 비? 눈비 없는 날이 어디 있을까, 복채? 놓고 싶은 대로 놓고 가, 여여심如如心보살, 구름에 대고 말하네, 먼 하늘가 헬리콥터 한 대, 소리도 없이 떠가는 여름 오후.
 
*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서
 
△김성춘: 1974년 '심상' 제1회 신인상(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선). 시집 '방어진 시편' '물소리 천사' '온유'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 '길 위의 피아노' 등 14권, 시선집 '나는 가끔 빨간 입술이고 싶다', 산문집 '경주에 말을 걸다' 출간. 울산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월간문학 동리상, 바움문학상, 최계략문학상, 한국카톨릭문학상 등 수상. 현재 '수요시 포럼' 동인 대표. 경주 '신라문화동인회' 활동.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경주지회장.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이 시는 김성춘 시인의 14번째 시집 '길 위의 피아노'의 맨 뒤에 실린 작품이다. 경주 아랫시장 여여심 보살이 구름에 대고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이 시집 읽기를 마무리했다. 헬리콥터 한 대 소리 없이 떠가는 여름 오후였다. 그런데 진정한 독서는 책을 덮고 나서야 다시 시작되었다. 시집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행복한 숙제(?)를 스스로 받아 안고 올 여름을 보냈다. 시집 한 권을 읽는 일이 이리 다양한 세상으로 나를 안내하다니. 시대를 넘나드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시집 속에 만나기 시작했다. 서늘하고도 뜨거운 피가 도는 긴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인도 봄베이에서 모래 조각가를 만났고 그가 만든 붓다 조각상을 보았고 그 조각상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파도를 보면서 시인이 쓰고 있는 '소멸'을 보았다. 에디뜨 삐아쁘를 만났고 대서양으로 추락한 그녀의 연인 마르셀을 위한 노래 '사랑의 찬가'를 들었고 그 노래를 숨죽이고 듣는 관중을 만났다. 그리고 스티브잡스의 강연을 들었고 오규원 시인을 만났고 퇴계 이황의 유언을 들었고 시인의 손녀가 치는 '길 위의 피아노'를 들었고 밥딜런의 질문을 만났다.

 김성춘 시인은 "이번 시집은 책 읽기가 시의 마중물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툭툭 꺾인다"라고 서문에서 말한다. 김언 시인은 "중요한 말일수록 타인의 말로 채워지는" 이 시집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사례들을 "결과적으로 시인의 말과 타인의 말이 경계 없이 허물어지는 지경을 맞이하면서 새삼 일깨워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시인은 위 시에서 나이가 드니 팔순의 김영감도 대릉원의 까치도 어제 만난 기왓장도 모두가 친구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고 눈물 같고 물거품 같지만, 수수께끼 같아서 살아 볼만한 오늘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두 말이 시집 전체를 구성하는 두 개의 축으로 보였다. "오늘 그 자체만으로도 삶은 호기심이고 심연이다"라고 서문을 열어서 "생, 이대로 굉장하다"는 켐벨의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시집 전체가 수미상관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 같았다. 시공을 초월한 여러 사람의 생이 함께 걸어가는 하모니 같았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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