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클립] 서동요는 과연 허구일까
[오디오클립] 서동요는 과연 허구일까
  • 장창호 극작가
  • 2021.09.01 07:58
  • 0
  • 온라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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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울림통] 장창호가 들려주는 삼국유사 (66)

 백제 법왕(法王)의 아들이자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 제30대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빼앗긴 백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 성을 공격하며 4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무왕은 서동설화에 따르면 어머니와 연못의 용(龍)사이에서 태어나 산 속에서 마(薯)를 캐다 팔며 생활했기에 서동(薯童)이라 불렸다. 서동이 미색이 뛰어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음해하는 향가 서동요를 지어 서라벌에 퍼트리니 마침내 궁궐에 쫓겨난 공주를 부인으로 맞아 드렸다는 내용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산골 소년 서동은 신라 공주의 조력으로 백제 왕좌에 오른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삼존불이 나타난 연못을 메워 지었다고 전해지는 전북 익산시 미륵사 절터에서 지난 2009년 놀아운 일이 벌어졌다. 서쪽 석탑에서 창건 내용이 적힌 금판이 나왔는데 사리를 봉하면서 적은 금판에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639)에 지은 것’이라는 발원(發願)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무왕의 왕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사택((沙宅) 성씨를 가진 백제 귀족의 딸이라는 뜻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인 백제 무왕은 신라에 맞서 모산성((母山城, 전남 남원)공격을 시작으로 독산성(獨山城, 경기도 오산)까지 10여 차례 이상 신라 서쪽 성벽을 공략하며 재위 기간 중 쉬지 않고 신라를 침략하며 백제 부흥을 꿈궜다고 기록돼 있다. 장인의 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역사서 기록과 상반된 서동설화와 선화공주에 대한 실존설 논란이 커지고 있다. 
 
 백제사를 전공한 한 사학자는 미륵사지에는 동.서 석탑 2기와 석탑 가운데 더 높은 목탑 1기가 있었는데 사찰의 중심이 되는 목탑의 발원자가 선화공주일 가능이 있다고 주장 하는가 하면 선화공주 존재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익산시가 매해 5월 여는 서동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도 형성 되었다.

 오디오클립 콘텐츠를 통해 서동설화 내용을 연기한 장창호 작가는 고대 국가 왕들은 여러 왕후를 거느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무왕 또한 왕비가 1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역사 사료가 많지 않은 서동설화 진위에 대해 예단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말하고 있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울산신문 오디오클립 'U울림통' 바로가기 
 ▶ 영상 보기 : 장창호TV [69] 무왕과 선화공주 

백제 무왕 때 궁궐 남쪽에 만든 인공 연못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의 야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연못으로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부여군 출처
백제 무왕 때 궁궐 남쪽에 만든 인공 연못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의 야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연못으로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부여군 사진 출처
2009년 1월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쪽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호(가운데)와 사리봉영기 등 유물. 국립문화재연구소 출처
2009년 1월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쪽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호(가운데)와 사리봉영기 등 유물.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가로 15cm 세로 10cm 크기의 금판 앞.뒷면에 붉은색 글씨로 각각 11줄 193자가 쓰인 글이 있다. 이글에서 639년 백제 무왕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百濟王后 佐平 沙宅積德女)'이라 적혀 있다. 사택씨(沙宅氏)는 백제 사비시대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미륵사 창건에 경제적 후원을 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출처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가로 15cm 세로 10cm 크기의 금판 앞.뒷면에 붉은색 글씨로 각각 11줄 193자가 쓰인 글이 있다. 이글에서 639년 백제 무왕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百濟王后 佐平 沙宅積德女)'이라 적혀 있다. 사택씨(沙宅氏)는 백제 사비시대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미륵사 창건에 경제적 후원을 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자리한 쌍릉 대왕릉 전경. 익산시 제공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자리한 쌍릉 대왕릉 전경. 익산시 사진 출처
국립전주박물관은 지난 2016년 전북 익산시 쌍릉 대왕묘에서 일제강점기 1917년 출토된 유물 중 신라 토기(위)와 여성 인골이 포함 됐다고 밝혔다. 사진은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출토된 토기(위)와 인골의 치아 일부(아래).  쌍릉 소왕묘 발굴에서는 피장자를 추정할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선화공주의 실존은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다. 국립전주박물관 사진 출처
국립전주박물관은 지난 2016년 전북 익산시 쌍릉 대왕묘에서 일제강점기 1917년 출토된 유물 중 신라 토기(위)와 여성 인골이 포함 됐다고 밝혔다. 사진은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출토된 토기(위)와 인골의 치아 일부(아래). 쌍릉 소왕묘 발굴에서는 피장자를 추정할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선화공주의 실존은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다. 국립전주박물관 사진 출처
일제강점기인 1917년 쌍릉을 발굴한 야쓰이 세이치가 수습한 인골을 나무상자에 모아 놓고 무덤 문을 닫아버렸다. 약 100년 후인 2018년 쌍릉 재발굴하면서 대왕릉 석실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나왔다. 인골은 60대 전후의 남성으로 밝혀졌다. 뼈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시도한 결과 사망 시점이 620∼659년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와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쌍릉을 발굴한 일본인 야쓰이 세이치가 릉에서 나온 인골을 수습하면서 나무상자에 모아 놓고 무덤 문을 닫아버렸다. 약 100년 후인 2018년 쌍릉 재발굴하면서 대왕릉 석실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나왔다. 인골은 60대 전후의 남성으로 밝혀졌다. 뼈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시도한 결과 사망 시점이 620∼659년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와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삼국유사 권2 제2기이 무왕(武王)조에 기록된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善化)공주 그리고 서동요에 관한 글이다. 규장각 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br><br><br>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br>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br>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br>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br>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br>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했다.<br>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면서 장차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br>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연히 믿고 좋아했다.<br>이로 말미암아 서동을 따라가면서 몰래 정을 통하였다.<br>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알았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br><br>聞新羅真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羙艶無雙, 剃髮來京師.<br>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br>乃作謡誘羣童而唱之云.<br>善化公主主隠, 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br>童謡滿京逹扵宫禁, 百官極諌竄流公主扵逺方.<br>将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br>公主將至竄所,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br>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恱.<br>因此隨行潛通焉.<br>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謡之驗. / 한국사테이터베스트 출처
삼국유사 권2 제2기이 무왕(武王)조에 기록된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善化)공주 그리고 서동요에 관한 글이다. 규장각 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면서 장차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연히 믿고 좋아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동을 따라가면서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알았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

聞新羅真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羙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乃作謡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隠, 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童謡滿京逹扵宫禁, 百官極諌竄流公主扵逺方.
将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恱.
因此隨行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謡之驗. / 한국사테이터베스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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