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법왕(法王)의 아들이자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 제30대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빼앗긴 백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 성을 공격하며 4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무왕은 서동설화에 따르면 어머니와 연못의 용(龍)사이에서 태어나 산 속에서 마(薯)를 캐다 팔며 생활했기에 서동(薯童)이라 불렸다. 서동이 미색이 뛰어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음해하는 향가 서동요를 지어 서라벌에 퍼트리니 마침내 궁궐에 쫓겨난 공주를 부인으로 맞아 드렸다는 내용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산골 소년 서동은 신라 공주의 조력으로 백제 왕좌에 오른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삼존불이 나타난 연못을 메워 지었다고 전해지는 전북 익산시 미륵사 절터에서 지난 2009년 놀아운 일이 벌어졌다. 서쪽 석탑에서 창건 내용이 적힌 금판이 나왔는데 사리를 봉하면서 적은 금판에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639)에 지은 것’이라는 발원(發願)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무왕의 왕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사택((沙宅) 성씨를 가진 백제 귀족의 딸이라는 뜻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인 백제 무왕은 신라에 맞서 모산성((母山城, 전남 남원)공격을 시작으로 독산성(獨山城, 경기도 오산)까지 10여 차례 이상 신라 서쪽 성벽을 공략하며 재위 기간 중 쉬지 않고 신라를 침략하며 백제 부흥을 꿈궜다고 기록돼 있다. 장인의 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역사서 기록과 상반된 서동설화와 선화공주에 대한 실존설 논란이 커지고 있다.
백제사를 전공한 한 사학자는 미륵사지에는 동.서 석탑 2기와 석탑 가운데 더 높은 목탑 1기가 있었는데 사찰의 중심이 되는 목탑의 발원자가 선화공주일 가능이 있다고 주장 하는가 하면 선화공주 존재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익산시가 매해 5월 여는 서동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도 형성 되었다.
오디오클립 콘텐츠를 통해 서동설화 내용을 연기한 장창호 작가는 고대 국가 왕들은 여러 왕후를 거느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무왕 또한 왕비가 1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역사 사료가 많지 않은 서동설화 진위에 대해 예단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말하고 있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