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연재 울산행복학교 교사

바퀴에 사람을 매달고 나는 비행기, 아수라장이 된 공항, 총을 메고 길거리를 거니는 남자들, 길거리 자취를 감춘 여자들, 철조망 넘어 아기를 건네는 부모, 아프간 떠나는 미군들.
 
2021년 8월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간 카불을 장악함과 동시에 벌어진 아프간의 모습이다. 
 
언급한 사건의 시발점은 알카에다가 세계무역센터(미국)를 공격한 2001년 9월 11일부터였다. 
 
미국은 알카에다의 수괴(오사마 빈라덴)를 잡기 위해 탈레반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동지였고 탈레반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미국은 이를 꼬투리 잡아 탈레반을 공격할 명분을 얻었다. 
 
미국의 목표는 탈레반을 아프간에서 몰아내고 미국에 우호한 정부를 세워 911테러와 같은 일이 미국 자국 내에 일어나지 않기 위해 아프간을 관리하길 원했다. 
 
20여년 동안 돈과 시간을 투자해 이루고자 한 미국의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원래 목표는 실패했지만 미국이 전해준 자유, 평등, 의사결정권과 같은 민주적 가치, 여성인권 향상 등의 이념은 천박한 아프간 땅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내 뿌리내렸다. 
 
뿌리에서 가지로 뻗기 전에 막을 내리다 보니 아프간 국민들의 절망은 이전보다 더 깊어졌다. 
 
특히, 여성들은 차별받던 시절로 회귀할 거라는 공포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집 안에 숨어버렸다. 
 
탈레반은 이슬람법도 하에 여성들은 자유롭게 교육을 받고 일을 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탈레반이 언급한 이슬람법은 이미 여성의 자유를 배제한 율법이다. 
 
모순이 전제된 말은 모순된 말을 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신뢰를 얻는다. 그 외의 사람들은 믿는 척을 할 뿐이다. 
 
뉴스 또는 시사프로에서 쏟아지는 비통한 아프간 관련 뉴스를 살펴보던 어느 날,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뉴스 한 꼭지를 발견했다. 

'돈 싸 들고 도망간 대통령…아프간 수도를 지킨 여성 교육부 장관 랑기나 하미디'(중략) 아프간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 랑기나 하미디는 탈레반을 카불을 점령할 때도 본인의 자리를 지키며 “내 딸이 꿈꿔왔던 모든 미래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며  “만약 살아남는다면 수백만 소녀들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아프간 교육부 장관은 아프간 소녀들의 교육권을 지키고자 아프간을 탈출을 감행하지 않았다. 
 

필자와 그녀의 위치와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교육'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안고 삶을 살아가는 입장이기에 해당 뉴스를 스쳐가듯 소비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용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뉴스에서 보여준 한 토막 기사로는 정확한 해답을 얻기 어렵지만 사실 보도에 따라 살펴보면, 필자가 본 그녀의 태도는 사회적 약자(불평등한 교육 기회에 놓인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높은 공감 능력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교육부 장관이라는 위치에서 굽어살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운명공동체로써 함께 한다는 생각이 없다면 암혹한 현실에서 목숨을 건 결기를 보여줄 수 없다. 
 
그녀가 수백만 소녀들에게 보여준 건 싸구려 동정이 아니다.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들을 더러 볼 수 있다. 
 
한 번도 나는 그 친구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봤는 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도움을 주고 가르침이 필요하면 가르침을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선생님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학생의 눈높이에서 교육 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가? 진정으로 입장을 바꿔 어려움에 처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한 적이 있는가? 그들이 느끼는 공포와 무력감을 깊이 새겨본 적이 있는가? 
 
여러 의문이 드는 밤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