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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성제 수필가
설성제 수필가

어느 중학교에 수업을 갔다가 쉬는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마스크를 살짝 걷어내었다. 나는 순간 신이 막 빚어서 내놓은 태초의 사람을 보는 듯했다. 과연 사람의 얼굴이구나 싶었다. 콧등은 산등성처럼 뻗어 내리고 어둡고 작은 동굴 두 개가 들숨날숨을 찾아 벌름거렸다. 불그스름하고 보드랍고 도톰한 살로 마주한 입술. 그 입술 속에는 상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 하얀 이들이 가지런할 것이었다. 약간 각이 진 턱선을 중심으로 해서 위로는 작은 볼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 얼굴. 과연 사람이었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 제각각 다른 표정의 눈만 보다가 생각지도 않은 얼굴을 보게 되자 '누구나 얼굴을 지니고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꽃보다 아름답고 별보다 빛나는 것이 사람이라지 않나. 특히 얼굴은 그 사람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자연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 없으면 미완의 느낌이 든다. 왠지 허허벌판 같고 공허하여 뭔가 소중한 보물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 보물이 바로 풍경 속에 깃든 사람, 그 사람의 표정인 것을.

 얼굴을 가린 채 살다 보니 이전에 충만했던 관계가 점점 허술해져 가는 듯하다. 본의 아니게 뭔가를 꽁꽁 숨기고 사는 듯도 하다. 가려진 표정이 돌처럼 굳어지고 차가워져서 간혹 민얼굴을 마주해도 표정을 찾기가 어렵다. 

 학생은 내가 놀라 주춤하는 순간 얼굴을 숨겨버렸다. 한줄기 깜빡 켜졌던 불빛이 섬광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교실은 다시 온통 얼굴 없는 인간들의 철장으로 변해 다시 무거워지고 말았다. 침묵의 대화로 와글거리는 교실에서 귀마저 멍멍해져 가는 듯했다. 
 일주일에 두 시간 만나는 학생들이다. 몇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학생들의 눈빛과 풍채만으로는 이름이 일치되지 않아 답답하다. 애꿎은 출석부를 들고 불렀던 이름을 또 부르는 나의 까막눈이 미안할 정도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은 순 거짓말 같다. 눈만 보아서는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백신도 나오고 방역도 잘하고 있어 곧 마스크를 벗을 줄 알았다. 이제 곧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닐 거라 생각했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처럼 답답하고 막혔던 문제들이 시원하게 풀릴 것을 날마다 아침마다 기대했다. 잃어버리거나 숨었던 표정이 살아나면 진정 사람다운 사람으로 마주할 것이라며 그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천만에 만만에 말씀. 바이러스는 알파, 베타, 감마, 델타변이까지 일으키며 살아남기 위해 파죽지세로 우리 생활을 진격하고 있다. 바이러스도 어쩌면 얼굴을 가리고 죽을힘 다해 싸우는 중일까. 이렇게 서로 얼굴을 가린 채 계속 투쟁에 투쟁을 하며 살아야 하다니. 아니 어쩌면 다음 언젠가부터는 마스크 대신 방독면을 하나씩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등에 산소통을 둘러메어 몸까지 가리고서 말이다. 

 점점 살아있던 얼굴을 잊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랑스런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없고, 마스크 속의 굳은 표정이 눈으로까지 전이되어 눈의 표정도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본다. 손바닥 만한 마스크 한 장으로 얼굴을 달랑 가렸을 뿐인데 삶도 자연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한편 잘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려나? 어차피 인생에 웃을 일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아서 얼굴을 가면으로 덮어쓰고 가식하며 살 바엔 차라리 가려진 채로 사는 게 낫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하니 모순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도태되는 법. 마스크 안에서 쪼글쪼글 쪼그라들고 있을 표정과 얼굴들을 생각하니 공기가 통하지 않는 비닐봉지 속에서 말라비틀어져 가던 야채들이 떠오른다. 표정이 마르면 오장육부는 성할까. 인간의 모든 것을 명령하고 느끼고 즐기는 뇌 또한 기능이 온전할까. 그 무엇보다 신비롭고 경이롭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얼굴인데, 희로애락이 사라지는 얼굴로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 또는 기계처럼 변해가는 중은 아닐까 두렵다. 

 얼굴이 보고 싶다. 에로스적으로도 아가페적으로도 보고 싶은 얼굴이다. 뜻하지 않게 학생의 얼굴을 본 날부터 사람에 대한 더 큰 동경이 생겼다. 사람이란 이토록 멋있고 아름다운 존재가 틀림없다. 다시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놓고 서로 마주 보며 사는 것이 일상인 날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인간의 죄와 자연의 어떤 재해와 재난으로 가려버린 얼굴을 찾으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정녕 어떻게 하여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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