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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화 수필가
윤경화 수필가

초가을 밤에 재킷 한 장 걸치고 마을 길을 나선다.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이 어둠을 더욱 강조한다. 벌레들의 사랑가에서 배어나는 간절함의 농도가 걸쭉하다. 하룻밤의 인연을 찾으려는 노래가 풀숲이나 계곡, 습지와 돌 밑에서 뭉글뭉글 밀려 나오고 있다.


 마을 끝자락에 이르자 올봄 홀아비가 된 남자의 집에는 거실에 불을 켜둔 채 자동차만이 밖에 덩그러니 있다. 나는 가던 길을 더 가지 못하고 돌아서 걷는다. 홀로된 남자의 외로움이 전염될까 두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생명체가 겪는 혼자만의 길을 그 남자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걷고 있다. 


 손전등을 켰다. 길 위에 눈길을 두고 느린 걸음을 옮겼다. 객사한 생명체가 즐비하다. 모두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다 주검으로 흔적을 남겼으리라. 모순되게도 산 자의 활기가 어둠에 묻힌 죽음 사이로 분주하다. 일개미들의 야간 단체 노동 현장이다. 그들을 따라가 본다. 누가 먹다 버린 천도복숭아 한 조각에 개미 떼가 뒤덮여 있다.


 뜬금없이 개미의 '2:6:2'의 법칙이 떠오른다. 어느 집단이나 20퍼센트의 최고와 보통의 60퍼센트 20퍼센트의 게으른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내 눈앞의 이 무리가 부지런한 20퍼센트의 개미들인가? 곧 세상이 끝날 것처럼 밤을 잊은 채 일하는 20퍼센트의 사람과 같지 않은가. 가본 적 없는 혼돈의 길이지만 혼신의 힘으로 가고 있는 개미를 통해 20퍼센트의 인간을 본다. 오늘밤 만난 일개미에 투영된 사람의 최근 존재 방식이 낯설게 다가온다. 


 코로나19 사태로 변화된 환경 속에 많은 사람이 강제로 게으른 20퍼센트에 편입되었다. 당사자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방식이 시대와 맞지 않으니 당연히 효율성은 떨어지고 급기야 후미 그룹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천성이 게으르지 않아도 하위 계층으로 밀리게 되는 재앙을 맞았기에 더욱 혼란스럽다. 


 조금 전 천도복숭아의 위치를 살짝 옮겼을 때 우왕좌왕하던 일개미처럼 당황해하며 그들은 새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물쭈물하다 뒤처지게 된 것을 깨닫자 어느 자영업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많은 이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지만 남은 자들 또한 비책을 마련하지 못한 이가 한둘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행로는 가보지 않은 길이다. 이 상황이 어떤 이에게는 흥미와 기대, 설렘으로 잠을 설칠 만큼 호기심을 갖게도 하지만 누구에게는 두렵고 불안하다. 그뿐인가. 수레의 짐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하는 시기에 다다른 이는 품격을 잃지 않고 완주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많은 사람에게 수레의 짐을 덜어내는 계획과 방식을 쓸모없게 만들었다. 모든 길이 미지의 세계라 하지만 두 해에 걸쳐 더 싣지도 덜어내지도 못한 채 수레를 끌고 있는 나도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실에 초연한 척, 형이상학적 존재인 척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문제인 현실은 결코 고상할 수만 없는 형이하학적인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생존의 고리가 모든 생명과의 연결체라는 사실이 요즘처럼 명확하게 드러났던 적은 없었다. 낯선 길 위에서 주변이 웅성거려 눈길을 돌리면 그들 또한 나와 비슷한 강제된 게으른 20퍼센트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낯선 상황을 만나자 사람의 눈에 비치는 풍경을 읽는 방식도 조금 삐딱한 게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 전의 추석 연휴엔 해외여행을 떠나는 인파들이 공항을 메꾸었다. 연휴가 주는 휴식의 각별한 맛에 상기된 표정으로 가족이나 친구, 연인들 사이엔 더할 수 없는 친밀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추석 풍경은 다르다. 코로나 사태 이후 두 번째로 맞는 추석에 정부에서는 국민에게 '코로나 상생 국민 지원금'이란 것을 주었다. 다수의 사람이 그 돈으로 해외여행 대신 정육점 앞에 줄 서서 고기를 사는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했다. 


 국민은 순식간에 형이하학적인 집단이 되어버린 듯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왜 고기에 대한 시장기를 느꼈을까. 이처럼 낯선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일원이 되는 과정에 경험하는 결핍의 심리와 시장기는 인간이 난관을 견딜만한 인내심을 키우기 위한 모종의 결탁인가. 황당한 이 현실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정 낯선 시간이다. 


 밝은 미래의 출구가 불확실한 터널에서 감당하기 버거운 시간이지만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듯도 하다. 육신과 나이의 괴리감을 부정하면서 날뛰던 일이 웃자란 나뭇가지 같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부풀어 있던 나의 현실과 의식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내가 대면하는 시간이 어제의 낯선 미래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늘 새롭고 낯설지만 어느 순간에 공업(共業)의 결과로 다가오는 환경은 모두에게 난파선이 될 수 있다. 코로나는 그러한 재난이다. 무심하게 누렸던 과한 호사의 대가가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


 20퍼센트의 강제된 게으름의 행로에 짐작하기 어려운 귀한 교훈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복희씨의 팔괘'*를 해석하듯 자연을 읽는 독서법에 관심이 간다. 만약에 바람의 방향과 기운, 냄새만 읽을 수 있어도 가보지 않은 길 위의 걸음은 그다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복희씨의 팔괘 : 복희는 삼황오제의 첫머리에 꼽는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자연계 구성의 기본이 되는 하늘·땅·못·불·지진·바람·물·산 등을 상징하는 팔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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