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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작은 어촌 꽃바위마을에 지난 1994년 세워진 높이 44.5m 화암추등대와 매립 부지에 들어선 현대중공업 공장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
울산 동구 작은 어촌 꽃바위마을에 지난 1994년 세워진 높이 44.5m 화암추등대와 매립 부지에 들어선 현대중공업 공장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

꽃바위라는 이름의 마을은 어떤 꽃으로 시월을 물들일까. 구절초, 해국, 감국이 노란 폭죽을 터뜨리는 이즈음엔 피고 또 함빡 피어도 꽃이 마구 그립다. 오늘은 시가 술술 떠오를지도 몰라 이생진 시인의 바다 시집을 끼고, 방어진항 서쪽 끝 '꽃방(꽃바위방어진) 마을'로 간다. 바위가 꽃을 피우다니, 그리움이 얼마나 여물어야 하는 일일까. 주차장이 곧 도로인 화암등대로가 1.3㎞ 방파제를 끼고 시원하게 길을 내준다. 초입부터 방파제 위 전망테크가 눈길을 끈다. 걸어서 들어가면 오가는 시간이 30분은 될 성 싶다.

등대를 만나고픈 마음이 앞섰으나 바닷바람 한 점은 만져주는 게 예의일 듯해 숨을 고른다. 중간중간 테크로 오르는 계단이 놓여있다. 아침에 맛본 재첩국같이 짭조름한 바다 내음. 수평선을 넘어 딴 세계로 가버릴 것 같은 아뜩한 항선들. 바다를 꽃피울 태세로 몽글거리는 흰 구름밭. 테트라포드에는 월척 삼매경에 빠진 낚시꾼들. 슬도등대와 동방파제 등대가 멀지 않은 곳에서 희고 붉은 바람을 모으고 있다. 산책을 나온 반려견과 견주도 가을볕이 일렁이는 바다 쪽으로 코끝을 민다. 바로 옆 현대중공업에서 '오후 휴식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분주한 손놀림을 잠시 멈춘 작업자들의 손끝에도 감국이 송이송이 피어날 시간이다.

나는 하얀 철문 앞에 선다. 집을 마련해둔 등대라니! 우람하기 그지없는 등대의 집. 낯선 방문객에게 차 한잔 내줄 듯 대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괭이 서너 마리도 제집인 양 어슬렁대고 있다. 나도 어슬렁어슬렁 돌아본다. 44.5m나 되는 동양 최대 높이의 등대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다른 등대와 달리 공장과 방파제로 둘러싸여 있으니 일부러 걸음을 하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일이다. 담장 너머에서 1600톤급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 두 기가 팔을 흔든다. 석유시추선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던 호시절엔 온몸을 들썩였으리라. 그 앞엔 몇 년째 출항을 손꼽고 있는 대형 유람선이 가을빛을 일렁인다.

화암추등대 입구 방파제를 따라 길게 조성된 전망 데크와 바다 전경.
화암추등대 입구 방파제를 따라 길게 조성된 전망 데크와 바다 전경.

잘 익은 단풍색 지붕을 인 화암추 항로표지관리소의 문이 굳게 닫혀있다. 누구 계시나요? 길손인데 차 한잔 주시겠어요? 아무런 메아리도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요리조리 살피면서도 왠지 붕 뜬 것 같은 시간이 흐른다. 휴식시간이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쓸쓸히 항로표지관리소를 등지는데, 강아지를 앞세운 중년이 벤치에 앉는다. 선물처럼 반가운 말벗이다. "산책 나오셨어요. 이 동네 사시나 봐요?" 이분도 이 하오가 무료했나 보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빛으로 청년부터의 추억담이 한 시간 넘게 이어진다. 현대중공업 직영 근로자로 일하다 8년 전에 퇴직했단다. 누런 월급봉투의 반 이상이 직장 앞에 즐비한 포장마차 외상술값으로 사라져간 나날. '집사람'들의 탄원으로 90년대 중후반에 월급이 계좌 이체되는 바람에 월급날의 '소확행'이 사라졌다는, 어쩌면 다행스런 전언. IMF도 비껴간 조선업 호황기에 열댓 집뿐이던 화암마을이 원룸촌으로 변모해간 사연이, 십 년 불황으로 이젠 원룸 한 채 지키기도 쉽지 않은 살림살이도 들려준다. 가로등 하나 없던 마을이 2005년 '꽃바위 원룸' 문패를 내건 이후 금세 2천 가구로 불어났단다.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그의 눈길이 크레인 쪽으로 간다. 호시절을 돌아보는 중이리라. '어서 옛날 같아져야 꽃바위가 살아날 텐데' 하는 생각이 한숨으로 터져나온다. 외국인 숙소도 텅 비었다니, 언론에서 접하던 울산 동구(특히 해양사업지구)의 경제난은 현재진행형이다. 문득, 한 장씩 넘기면 갯내가 묻어나오는 시집을 펼친다.
 
화암추에서는/ 어떤 명목으로도/ 화암추는 그들의 재산/ 소라는 그들의 시라기보다/ 그들의 혈장(血漿)/ 해삼은 그들의 장수라기보다/ 그들의 수당/ 화암추에서는/ 일출도 그들의 생활비  - 이생진, '생활비' 전문('성산포'를 '화암추'로 바꿈)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이메일: climbkbs@hanmail.net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climbkbs@hanmail.net

문 꼭꼭 걸어 잠근 등대 집안은 둘러보셨냐니까, 중년은 산책할 때마다 들렀단다. 전망대에서 울산항을 오가는 배들, 장생포 바다, 번화한 시가지, 석유화학공단, 중공업단지, 자동차공장을 내려다보며 답답한 심사도 잠시 내려놓았다고. 예전엔 2층집 옥상에서도 훤했던 화암추등대가 이제는 건물에 막혀 산책길을 나서야만 만날 수 있으니. 벤치에 드러누워 한숨 늘어졌던 강아지가 쭉쭉 기지개를 켠다. 낑낑, 볼일이 생긴 모양이다.

나도 기지개를 켜고 등대를 올려다본다. 하늘에서 보면 갈매기가 나는 모양이라는데 땅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노랑과 파랑으로 이어진 소리체험 나팔관에 귀를 대고 사진을 찍는 순간이었다. "화면을 16 : 9로 맞추세요!" 나팔관을 울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등대 사진을 찍는 남성이 뒤에 서 있다. 내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거리며 액정 구도를 조절해 준다. 스마트폰 활용 강사를 비롯한 다방면의 재주를 새긴 명함을 건네받았다. 대왕암과 일산진해수욕장과 슬도를 돌며 하루 2만 보를 걷는 '아날로그 자유 여행가'로 50년째 이곳 주민이란다. 화암추등대의 절경인 놀을 보러 나온 길이라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아호까지 '화암'이다. 울타리 밖을 향한 내 소라 귀가 번쩍한다. 동구는 물론이려니와 울산 땅은 밟지 않은 곳이 없다니, 나는 그만 화암추등대 앞의 겁먹은 고양이처럼 옴츠리고.

"꽃바위를 보고 싶다고요? 해안에 지천이던 꽃바위, 이제 없어요. 꽃바위라 불리는 화암마을과 이웃 화잠마을을 매립해 현대중공업 2공장과 이 등대가 들어섰으니까. 아시다시피 1962년에 울산이 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울산항 선박이 많아지다 보니 암초나 기상이변 때문에 사고도 많았지요. 그래서 등대로 입구에 거북이 모양의 화암추등대가 세워졌습니다. 그 뒤로 공단이 확장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등대 불빛이 가려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현대중공업에서 바로 이 자리로 등대를 옮기고 더 높이 세운 겁니다. 등대 불빛이 주변의 네온사인으로 또 기능을 잃게 되자 2002년에 10m를 더 올려 지금의 모습이 되었어요." 마치 이곳의 등대지기인 양 화암추(花岩湫, 꽃바위 주변)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으신다. 인적 없는 무인등대에서 구원군을 만난 듯. "저기 들어가 보면 엄청 넓어요. 1층에선 한때 결혼식도 했으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과 9층을 돌아보면 볼거리도 많고. 아 참. 꽃바위는 당연히 망원경으로도 안 보입니다. 추위를 무릅쓴 매화나무가 거무스레한 가지에 피우는 꽃을 상상해봐요. 꽃바위가 딱 그랬지요. 찬 바닷물에 몸을 담근 바위가 썰물과 밀물에 쓸리고 시달리면서 피운 하얀 매화는 참말 비경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거북이도 꽃바위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머나먼 바다로 떠나갔습니다. 무슨 바람을 타고 갔는지…."

화암추등대의 등명기에 불이 들어온다. 푸른 바다의 어둠이 불빛에 스민 듯 옅은 오렌지빛이 감돈다. 20초에 한 번씩 흰색과 적색을 번갈아 내보내는데, 항로 입구에 암초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조선업의 불황과 팬데믹은 1층 홍보관의 울산항과 등대 역사도, 전망 타워의 바다와 해양 관련 이야기도, 바위에 무성히 피어난 소금꽃 같은 상상의 불빛만을 켜 든다. 하얀 대문을 나서며 바라본 저녁놀조차도 흐린 구름 뒤를 맘껏 상상하라며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상상의 담장 너머, 등대 왼편으로 거대한 자동차 운반선이 들어온다. 소나타 1만 대를 실을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크기에, 처음 마주치는 물체에 한껏 입을 벌리다가, 귓전을 흔들어대는 저 크나큰 뱃고동같이 꽃바위 마을이 살아나길, 나는 무심코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 2011년 이후로 울기등대에서 원격으로 관리하게 되어 무인화한, 이토록 희고 둥글고 높다란 화암추등대의 오렌지빛이, 어두운 먼바다를 응시하는 길손의 가슴마다 동트는 새벽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를.

화암추등대 앞 바닷가의 테트라포드와 수평선에 줄지어 선듯한 선박의 모습.
화암추등대 앞 바닷가의 테트라포드와 수평선에 줄지어 선듯한 선박의 모습.

가까운 망개산에서 찍는 12월의 일몰 사진이 명품이라는 팁을 건네며 '화암 선생'이 떠나고 나도 화암추를 벗어난다. 밤낚시를 나온 이들의 눈에 아른거리고 있을 꽃바위의 물결이, 난바다를 비추기 시작하는 화암추등대의 불빛처럼 짙어져 온다. 꽃바위 묻힌 자리를 꽃불로 물들이는 등대와 거대한 공단을 돌아보며 나는, 화암추등대와도 흡사 어울리는 이생진의 시편을 다시금 읊조린다.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찾는다/ 등대를 찾는 사람은 등대같이 외로운 사람이다/ 무인등대가 햇빛을 자급자족하듯/ 사람도 외로움을 자급자족한다/ 햇볕을 받아 햇볕으로 바위를 구워 먹고/ 밤새 햇볕을 토해내는 고독한 토악질/ 소풍 온 아이들이 제 이름을 써놓고 돌아간 후/ 등대가 더 쓸쓸해진 것을 애들은 모르고 있다   - 이생진, '녹산등대로 가는 길 3'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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